케리그마 [영] Kerygma [그] Kerugma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을 얻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는 설교나 선언의 내용, 혹은 선언하는 행위를 케리그마라고 한다. 이 말은 케뤼소(Kerusso)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케뤼소란 그리스어로 ‘선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성서가 예언자를 통해 이미 약속한 복음’(로마 1:2)을 목적으로 하여 61회나 사용되었다. 미루어 보건대 케리그마란 하느님의 심부름꾼(Kerux)이 일정한 소식(하느님의 날, 혹은 복음)을 대중에게 선포하는 행위, 혹은 그 내용이다. 케리그마의 중심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4), ‘믿을 만한 진실’(로마 10:18), 단순히 ‘말’(logos, word, 사도 17:11)로 표현되었다. 케리그마가 포함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그에 의한 해방과 구원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부활과 심판을 위한 재림을 암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었다. 초기의 케리그마 선포자(Kerux)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의 투쟁 · 고통 · 죽음 · 부활 · 인류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것은 결국 하느님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몸소 인간의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또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됨과 동시에 그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적 종말론적 운명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선포자들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고 촉구하였다.

케리그마의 내용을 요약하면 ① 구약시대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고 새로운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사도 2:16, 3:18 · 24). ② 예수는 다윗의 자손(사도 2:30-31)으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민족 가운데서 그의 힘을 드러내 보이고, 기적을 행하여 예수가 하느님이 파견한 자임을 알게 하였으며(사도 2:22, 3:22) 하느님의 예지와 계획에 의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고(사도 2:23, 3:13-14) 다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사도 2:24-31, 3:15, 4:1). ③ 부활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는 영광을 드러내 보였다(사도 2:33-35, 3:13, 4:11, 5:31). ④ 교회에서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의 표징이다(사도 2:33, 5:32). ⑤ 그리스도는 메시아시대의 완성을 위해 재림한다(사도 3:21, 10:42). ⑥ 회개를 통해 죄의 사함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사도 2:38-39, 3:19)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사적 전기(救世史的 傳記)라고도 할 수 있다. 2세기경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도교 비방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케리그마의 내용을 수정하였다. 그 뒤 교부시대에는 성서의 케리그마적 접근방법을 무시했고, 신학 연구에 재도입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앙의 신비와 효과적이고 동적(dynamic)인 신앙의 실현을 중시하는 신학의 조류에 따른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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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넬주의 [한] ∼主義 [영] Quesnellianism

프랑스의 얀센주의자인 케넬(P. Quesnel, 1634∼1719)의 은혜에 관한 학설.

예수회원으로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케넬은 1672년 ≪복음의 교훈 요약≫(Abrege de la morale de 1’Evangile)을 마른의 주교 샬롱(Chalons sur Marne)의 서문을 실어 출판하였다. 이 책은 후에 ≪도덕적 반성≫(Refiexions morales)이라는 이름으로 증보(增補)되어 출간되었는데 케넬은 여기서 형식화된 영성을 비판하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위해서는 성서를 세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1675년 케넬의 저서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에 빠져 있다고 판정되어 금서 목록에 수록되었고, 그는 얀센주의자로 단죄되었다. 1710년 루이 14세의 추방명령에 따라 그는 프랑스에서 쫓겨나 오를레앙, 브뤼셀 등지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네덜란드로 탈출하여 그 곳에서 이교적(異敎的) 교회까지 세워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의 은혜에 관한 설은 교회 안에만 하느님의 은혜가 내리고, 교회 밖에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며, 은혜를 받지 못한 인간은 어떤 선(善)도 행할 수 없고, 죄인의 행위는 모두 죄에 속하기 때문에 죄인은 기도를 하거나 미사에 참여하여도 그것이 모두 죄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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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원] Kenya

적도상의 동부 아프리카의 열대 농업국가. 인도양, 탄자니아, 우간다, 수단, 이디오피아, 소말리아 등과 접경하고 있으며, 면적 58만 2,646㎢, 인구 1,786만명이며 그 중 약 355만 4,000명이 가톨릭 신자이다(1982년 현재).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케냐 해안지역을 발견하였으나 조직적인 포교활동은 1844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오면서부터였다. 1953년에 교계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수도 나이로비는 주교구가 되었다. 500명여명 사제 중에서 약 60여명의 아프리카 출신 사제가 있으며, 이들은 국민학교, 중등학교, 가톨릭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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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성당 [영] Cathedral of Canterbury [한] ∼大聖堂 [관련] 성공회

최초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아우구스티노 대주교가 착공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완성하였으나, 1067년에 불에 탔다. 1100년부터 1130년까지 성당 내의 행진과 성인(聖人)들의 유보(遺寶)를 전시하기 위하여 개축하였으나, 다시 1174년에 화재를 입고, 콰이어(choir, 성가대석)는 월리엄의 이름을 가진 영국인과 프랑스인 건축가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다(7411∼1184년).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대주교의 유해와 유류품들이 성당의 ‘성삼위 일체 경당’(Chapel of Holy Trinity)에 모셔져 있다. 교회의 중앙부는 1379년부터 건축가 헨리 이벨르(Henny Yevele)에 의하여 수직선으로 개축되었으며, 종탑(鐘塔)은 1500년경 존 와스텔(John Wastell)이 다시 지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은 영국에서 제일가는 성당이며,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장엄 정교하다. 캔터베리 대성당에는 많은 성인과 대주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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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영] Canterbury

600년경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604 혹은 605)에 의해 창설된 옛날 영국의 중요한 수도대교구(首都大敎區). 그레고리오 대교황에 의해 파견된 그는 교황이 지목한 런던 대신에 국왕 에델버트(Ethelbert)가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가장 강력하고 개화된 앵글로색슨 왕국의 수도를 남부영국의 수도 대교구좌로 선택하였다. 캔터베리는 그 자체가 로마식 도시로서 교계조직이나 건축 등이 로마의 축소판이었다. 캔터베리교구는 동부 켄트와 그 주변부로 구성되어 항상 작았지만 그 관구는 웨일즈를 따라 험버(Humber) 지역에 이르는 전 남부를 포괄하게 되었다.

653년까지 캔터베리는 아우구스티노와 이탈리아인 동료들인 라우렌시오(Laurentius), 멜리토(Mellitus), 유스토(Justus), 호노리오(Honorius) 등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첫 앵글로색슨 대주교로는 프리토나스(Frithonas, 재위 : 655∼664)였고, 테오도르(Theodore, 668∼690) 대주교에 의해 영국교회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802∼803년에 걸쳐 수도 대교구좌로서의 캔터베리의 수위성(首位性)이 교황과 관구공의회에 의해 인정되었다. 9세기 노르만 침입으로 첫순교자인 대주교 성 알페즈(St. Alphege)를 낳았다. 노르만 정복 이후 란프란크(Lanfranc, 1010?∼1089)와 같은 대주교의 지도로 국왕들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수도원 및 교회개혁을 단행하여 다른 수도원들의 귀감이 되었다. 안셀모(Anselmus, 약 1033∼1109) 대주교는, 월리엄 2세 및 헨리 1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으며 클래렌던 헌법에 대한 성 베케트(St. Thomas Becket, 118?∼1170)와 헨리 2세 사이의 논쟁은 결국 전자의 순교를 초래, 캔터베리의 중심적 위치를 확인시켰으며 베케트의 묘소로의 순례여행은 중세에 큰 인기를 끌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한 랭턴(Stephen Langton)의 임명으로 종결된 선거(1205∼1207년)는 영국 교회사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그 이후 성 에드문드(St. Edmund of Abingdon), 보니파시오(Bonifatius of Savoy), 킬와르드비(Robert Kilwardby), 페컴(John Peckham), 로베르토(Robert of Winchelsea) 등의 훌륭한 주교들이 출현하여 라테란(1212년), 1, 2차 리용(1245, 1274년) 등의 개혁 공의회에서의 헌장발표에 크게 기여하였다. 14∼15세기 주로 귀족 출신이었던 대주교들이 교회에 대한 왕권 강화에 힘쓰는 반면에 정치에 간여, 왕의 주요한 반동적 충고자였던 시몬(Simon of Sudbury, 재위 : 1375∼1381) 대주교는 농민봉기 때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6세기 헨리 8세와 가타리나(Catherine of Aragon)의 결혼이 교황에 의해 지지받은 뒤 왕의 앞잡이였던 대주교 크랜머(Thomas Cranmer, 재위 : 1533∼1556)는 교황의 허가를 무효로 선언,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웠으며 이에 따라 모든 수도원과 성당이 폐쇄되고 교구의 장원은 국왕에게 넘겨졌다. 그 뒤 메리 튜더(Mary Tudor, 재위 : 1553∼1558)의 즉위로 로마가톨릭이 부활되고 추기경 폴(Reginald Pole)이 대주교이자 교황대사로 임명되었으나(1556∼1558) 이들의 죽음으로 가톨릭으로의 복귀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수위헌장과 기도방식 통일법령을 부활시켰으며 캔터베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령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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