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복 [한] 崔再福

최재복(1901∼1984). 대구 교구 청년 운동가. 세례명 요한. 호는 노호(蘆湖). 경북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최정복(崔正福), 윤창두(尹昌斗), 이효상(李孝祥), 서정섭(徐廷燮) 등과 대구교구의 청년운동을 주도, 1924년 대구교구 청년연합회를 조직하는 한편 같은 해 해성학교 출신자들로 구성된 취주악대 해성악대(海星樂隊)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27년 대구교구 청년연합회에서 사회 · 교육 · 출판사업의 하나로 월간지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 <가톨릭新聞>의 전신)를 창간하자 편집위원이 되었고, 1933년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천주교회보>가 폐간되면서 청년연합회 활동이 부실해지자 1942년 성가대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그 후 8.15광복이 되고 청년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어 1948년 9월 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재발족되면서 부회장에 선출되고 이듬해 <천주교회보>가 속간되자 동지(同誌)의 논설위원이 되었으며, 이어 대한 천주교 연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교회의 발전과 청년운동에 헌신하였다. 1984년 10월 30일 지병인 뇌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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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 [한] 崔仁喆

최인철(?∼1795). 순교자. 최인길(崔仁吉)의 아우. 그는 신부 영입을 위해 북경에 갈 노비(路費)를 마련하는 등 신부 영입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뒤로는 홍필주(洪弼周), 황사영(黃嗣永) 등과 함께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와 교회발전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형 최인길이 순교한 뒤 집안 깊숙이 숨어 두문불출하다가 최창현(崔昌顯), 최필공(崔必恭)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1801년 7월 2일(음 5월 22일) 체포되어 참수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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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서 [한] 崔仁瑞

최인서(1810∼1868). 순교자. 일명 영준(英俊), 세례명은 요한. 경기도 용인(龍仁) 출생.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서울 애고개[지금의 阿峴洞]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한 7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고 박해가 점점 가열되자 1866년 6월말 장치선(張致善), 박성집(朴聖集) 등 10명의 교우들과 함께 조선의 박해상황을 프랑스 정부에 알리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이어 이해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자 리델 신부를 태우고 강화도에 정박중인 프랑스 군함에 승선, 리델 신부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칼레(Calais, 姜) 신부, 페롱(Feron, 權) 신부의 소식과 박해상황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1868년 5월(음)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아내 주 데레사는 옥사하고 자신은 2명의 교우와 함께 강화도에서 처형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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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길 [한] 崔仁吉

최인길(1764∼1795).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역관(譯官)의 아들. 조선 교회 초창기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공동집회를 가졌을 때 적발[乙巳秋曹摘發事件], 김범우와 함께 체포되어 김범우는 유배되고, 그는 효유 석방되었다.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신부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최창현(崔昌顯), 지황(池璜) 등과 힘을 합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794년 주문모(周文謀)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주 신부의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고, 1795년에 박해가 심해져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되자 주 신부를 대신하여 자기가 교회의 두목이라고 자칭하여 체포됨으로써 그 뒤 얼마 동안 주 신부를 피신케 할 수 있었다. 지황, 윤유일과 함께 1795년 6월 28일 31세로 옥중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시체는 강물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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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한] 崔益鉉

최익현(1833∼1906).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대(大) 유학자. 의병장.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최대(崔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고, 1855년(哲宗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1868년 장령(掌令)으로서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 이로 인해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직곡(直谷)에서 5년간 은거하였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기용되어 다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민비(閔妃)일파에 의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승진되자 더욱 강력하게 대원군을 탄핵,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으나 자신은 제주도록 유배되었다. 1875년 풀려나와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5개조의 배일척사소(排日斥邪疏)를 올렸다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어 1879년 풀려났고, 그 후 1895년 갑오개혁 때 단발령을 강력히 반대하여 다시 투옥되기고 하였다. 1898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고, 이후 중추원의관, 의정부찬정, 경기관찰사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하고 배일 ·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주장하여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임병찬(林秉瓚) · 임낙(林樂) 등 80여명의 제자와 함께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규탄하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후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淳昌)에서 일본군 · 관군 등과 교전하였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중 일인(日人)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유소(遺疏)를 임병찬에게 구술(口述), 이를 올리게 한 후 굶어 죽었다. 최익현은 조선말기의 대유학자로서 스승 이항로의 학풍을 이어받아 척사론(斥邪論)에 있어서도 강력한 논조를 띠고 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한 배척은 천주교에 대한 배척보다 더욱 강력한 것으로 그의 반평생 배일 · 항일으로 일관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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