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청년 [한] ~靑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결정에 의해 가톨릭청년사에서 발행한 가톨릭월간잡지. 1933년 3월 6일 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延吉)의 5개 교구장들은 정례 주교회의에서 주로 전교방침을 논의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각 교구별로 발행되고 있던 각종 출판물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이 5교구 연합출판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에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를 위원장으로 선출함과 동시에 대구교구에서 발행해 오던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와 서울교구 청년회에서 발행해 오던 <별>을 동시에 폐간시키기로 결정하고 새로 지식청년을 상대로 한 <가톨릭청년>지를 발간키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같은 해 6월 10일에 국판(菊版)크기의 100여면에 달하는 창간호가 서울에서 발간되었는데, 이는 <경향잡지>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인했던 잡지였다. 당시 <가톨릭청년>은 그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일제(日帝)하의 대표적인 월간잡지의 하나로 손꼽히었다. 발행 및 편집인은 라리보 주교였으나 편집실무는 주로 정지용(鄭芝溶)이 담당하였고 주간은 윤형중(尹亨重) 신부였다. <가톨릭청년>은 창간사에서, “가톨릭 정신은 사랑과 광명과 평화의 정신이니, 사랑은 천주와 교회와 사회를 사랑함이요, 광명은 영원한 진리와 지식과 의무를 밝힘이요, 평화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화목함이니, 이같은 가톨릭 정신을 뿌리기 위해 새 것을 발간케 되었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 편집내용은 한국 천주교의 어제와 오늘을 찾고 내일을 밝히는 종교적 신학적 제문제를 다룬 논설을 주종으로 하여 종교잡지로서의 면목이 뚜렷하였다. 또한 근대 조선사회가 당면한 제반 과제에 대한 각종 논문과, 시(詩) · 소설(小說) · 수필(隨筆) 등 수준 높은 문예작품을 다수 수록하여 격조 높은 종합 교양잡지로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월간지로 발전하였다.

권두언(卷頭言)은 5교구장과 황해 및 전라도의 두 감목대리가 교대로 집필하였고, 장발(張勃), 이병현 화백이 표지의 그림을 담당하고, 이병기(李秉岐), 허보(許保), 장서언(張瑞彦), 정지용, 이상(李箱), 김기림(金起林), 유치환(柳致環), 이효상(李孝詳)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의 시와, 오기선, 오기순, 강석현, 최민순, 이동구, 정지용 등의 수준높은 창작소설을 게재하여 가톨릭 문학의 제창을 통해 한국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더욱이 1934년 11월에 발간된 제2권 11호부터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의 편집체제를 한글 전용으로 전환함으로써 한글 보급에 앞장섬과 동시에 한국 가톨릭문화의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공헌하였다. 그러므로 민족문화 말살을 강요해 온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36년 12월 제4권 12호 즉 통권 제43호를 마지막으로 자진폐간되었다.

광복후 1947년 4월에 제5권 제1호로 복간되었으나, 6.25로 다시 휴간되었다가 1955년 1월부터 속간되었다. 그뒤 1971년 9월부터는 제호(題號)를 <창조>(創造)로 개제(改題)하여 월간종합지로 간행되었다. 그뒤 <창조>는 필화사건으로 인하여 1972년 11월 무기휴간 되었다. 이 <가톨릭청년>은 근대 한국문학사 연구와 가톨릭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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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지성인단체연합회 [한] ~知性人團體聯合會

가톨릭의 이념에 따라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전문분야별 활동을 통하여 사회를 그리스도교화한다는 목적으로 1967년 4월 2일 발족되었다. 이 단체의 필요성은 이미 1966년 말부터 청년사도회, 가톨릭법조인회, 가톨릭의사회, 가톨릭여학사회, 가톨릭교사회, 가톨릭의대학생회, 고려대 가톨릭학생회 등이 주축으로 제기한 바 있었고, 이 날 창립총회에서는 서울, 대구, 광주, 인천, 부산, 전주 등 교구의 18개 단체 40여명이 모여 회장에 유홍렬, 부회장에 김정진, 사무처장에 이인선 등의 임원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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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중앙의료원 [한] ~中央醫療院 [영] Catholic Medical Center

가톨릭대학 의학부를 중심으로 부속병원, 연구소 및 기타 부설기관 등을 산하기구로 하여 긴밀한 조직을 통해 교육 · 연구 · 진료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총괄하고, 전국에 산재한 가톨릭 의료기관과의 유대와 협력을 통하여 지역사회 의학발전에 공헌하기 위하여 1962년 6월 16일 설립된 기관이다. 1935년 3월 서울교구가 인수한 성모병원(당시 중구 저동 소재, 현 자선진료소)이 모태가 되었고, 1954년 5월 성신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 의학부가 개교한 뒤 그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61년 12월, 현재의 성모병원이 개축되어 14개 전과목의 진료를 개시하였고, 1962년 6월 의학부 및 8개 부속병원을 통합 개편하여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총괄하게 되었다. 1983년 현재 의학부 및 5개 연구소와 11개 부속병원을 총괄하고 있는 한편 강남(江南) 지역에 지역사회종합의학센터를 설립함으로써 학교 교사(校舍) 및 병원 건물, 연구소 등을 한 곳에 집약시켜 효율적인 운영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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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중고등학생연합회 [한] ~中高等學生聯合會 [영] Korea Young Catholic Students

가톨릭교를 신앙하며 중등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사도직 단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학생들이 개인적으로는 학생활동과 신앙생활을 보다 알차게 하며 집단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펴고 그의 구속사업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부조리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공동으로 그 사업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1961년 5월 창립되었다. 가톨릭대학생연합회의 한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가 독립되어 창립된 연합회는 두 가지의 큰 기능을 하고 있다. 첫째,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종교교육, 그룹활동에서의 토의, 집단활동을 통한 건전한 사고, 판단력, 희생적 봉사정신, 협동, 양보, 형제애적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국가와 교회가 바라는 인간상으로 성장하도록 하며, 둘째,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하느님의 백성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랑을 통한 사도직 대열에 참가하여 내일을 위해 준비하도록 하게 함에 있다. 결국 이 단체의 목적은 사회가 좀더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될 수 있도록 함에 있다.

1959년 필리핀에서 개최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아시아 지구회의에 참석한 나상조(羅相朝) 초대 지도신부에 의해 학생운동의 한 방법인 셀 테크닉(cell technic)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후 이 연합회 활동의 중요한 방법으로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다. 1974년 전담 지도신부로 김운회 신부가 부임했으며 1978년 8월 20일 I.Y.C.S.(International Young Catholic Student)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1979년 3월 공식 명칭도 K.C.S.M.(Korea Catholic Student Movement)에서 K.Y.C.S.(Korea Young Catholic Students)로 개칭하였다. 학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연합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학교에서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미인가 문제로 학도호국단 새마을부의 종교반으로만 존속해 있다. 현재 전국연합회 산하 각 교구별 연합회가 있고 각 교구별 연합회 산하 각 지역별 유니트(Unit)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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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조선 [한] ~朝鮮

1934년 1월 평양 교구에서 창간된 월간지. 편집자는 홍용호(洪龍浩)신부. 편집실무는 주로 김구정(金九鼎)이 담당하였고, 매월 20일 50~90면의 국판으로 발간되었다. 창간당시 제호는 <가톨릭연구강좌>였으나 1934년 3월 평양 관후리 성당 사제관에 있던 편집실이 서포(西浦)의 교구관리소로 이전되면서 이해 7월 <가톨릭연구>로 개칭되었고, 1937년 다시 <가톨릭조선>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사무소의 명칭도 가톨릭연구사(硏究社)에서 가톨릭교화사(敎化社)로 바뀌었다. 잡지창간의 동기는 1933년 9월 평양교구에서 실시한 전교회장들의 강습회였는데, 강습회에 참석했던 전교회장들이 강습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전도협회’라는 후원회를 조직했고 강사진들은 이 후원회의 재정적 도움으로 강의록 형식의 <가톨릭연구강좌>를 발간하게 되었다. 후원회는 가톨릭연구사로 발전, 인쇄를 담당하게 되었다. 창간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출판?문화 상황은 1933년의 주교회의 결정에 의해 교회 내 모든 정기간행물이 폐간되고 새로이 <가톨릭청년>이 탄생한 때라 <가톨릭연구>의 창간은 주교회의의 결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창간사(創刊辭)에서 홍용호 신부는 <가톨릭청년>을 포교전의 돌격대로, <가톨릭연구>를 돌격대의 무기인 창과 검으로 비유하여 <가톨릭 연구>의 창간을 정당화시켰다.

<가톨릭 조선>의 내용은 초기에는 성서해설, 호교, 교회사, 전례, 주일학교 교리 등이 주류였으나 점차로 문예란, 수양란, 독자란, 아동란 등이 증설되어 다양해졌고, 1934년 8월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 중앙부’의 기관지로 결정된 뒤로는 내용적으로나 체제적으로 더욱 다양해졌다. 내용상 특기할만한 것은 성월들과 한국 교회에 관계된 특집들로 특히 ‘조선순교기념’(朝鮮殉敎記念), ‘조선가톨릭세기연보집’(朝鮮~世紀年報輯), ‘축하대회특집’(祝賀大會特輯), ‘대구교구설정 26주년기념’(大邱敎區設定26周年記念), ‘간도선교40주년기념’(間島宣敎40周年記念) 등의 특집은 오늘날에도 높이평가되고 있는 수준작이었다. 그러나 1936년 <가톨릭청년>의 폐간이후 한국 교회의 단 하나 남은 잡지로 한국 가톨릭의 문화, 학술을 대변하던 <가톨릭조선>은 193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하게 되었다. 페간호에서 당시 발행인 부드(Booth, 夫) 신부는 재정난과 독자대중의 인식부족 등을 폐간의 이유로 들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재정난이었다. <가톨릭조선>은 일제 하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 가톨릭에 끼친 문화적 공헌과 평양교구사 연구를 위한 사료로서 그 의의와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天主敎平壤敎區史, 분도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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