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 [한] ~大學 [영] Catholic College

가톨릭 신학자 및 성직자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경성구 천주교유지재단에서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현재 신학부와 의학부 및 대학원과 부속 연구기관등이 있다 신학부는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서 시작되었고, 의학부는 1954년 4월 8일 신설되었다 신학부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의학부는 서울 강남구 반포동에 소재하고 있다.

1. 가톨릭대학 신학부 : 한국 가톨릭 신학교육의 중심기관으로서 한국 가톨릭 신학교육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선교사들은 정하상(丁夏祥)에게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시켜 사제로 서품시키고자 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 때 그가 순교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선교사들은 1836년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들 중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활동하였다. 그런데 김대건은 1846년 병오박해 때에 순교하고, 최양업은 1861년 과로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교회에서는 1854년 학생을 선발하여 신학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고,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현 충북 제천군 현양면 구학리)에 신학당을 세워 신학교육에 착수하였다. 이 배론신학교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점차 묵인되어 가자 1882년 교회에서는 다시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반도 페낭(Penang)에 소재한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유학생은 모두 21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페낭의 기후조건이 한국인에게 맞지 않았고, 또 국내에서도 신앙자유의 폭이 넓어지자 국내에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그 결과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흥골(현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에서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교명(校名),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 예수성심신학교는 1886년 서울 용산(현 서울 龍山區 元曉路 4가 1번지)으로 이전하였다. 예수성심신학교에서는 국내에서 새로 선발한 신학생들과 말레이 페낭에 소재한 신학교로 유학보낸 신학생들을 귀국케하여 교육을 시켰다. 당시의 교과과정은 성직자에게 필요한 철학 · 신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 한문 · 역사 · 지리 · 천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 졸업자로서 사제로 서품된 한국인들은 강성삼(姜聖參), 강도영(姜道永), 정규하(鄭圭夏) 등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페낭으로 잠시 유학을 가긴 하였지만 바로 이들이 한국 내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들이었고, 신학교를 개교한 지 10여년만의 일이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함께 1914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의 신학생들을 위하여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고,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새로운 대신학교를 설립하여 북한지방 출신의 신학생들 일부를 교육하게 됨으로써 예수성심신학교는 주로 중부지방 출신의 신학생들만을 교육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1942년 예수성심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은 덕원신학교에 수용되어 공부하거나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학교의 재개교(再改校)를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아 1945년 2월 23일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여 설립 인가를 받았고, 교육과정은 예과 4년, 고등과 2년의 중등교육과정과, 본과 4년, 연구과 2년의 고등교육 과정을 설정하였다. 정식 개교(開校)는 광복 후 현재의 서울 혜화동(惠化洞)에서 남한 출신의 신학생들과 소련군의 진주로 인하여 피난해 온 덕원신학교의 신학생들과, 유학갔다가 귀국한 신학생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1947년 4월 30일 ‘문고 제31호’에 의해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이 설립주체가 되어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 인가되었다. 그러나 6.25동난으로 인하여 휴교를 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제주도 서귀포에서 재개교하였다가 같은 해 4월 5일 부산 영도(影島)에 가교사를 건축하여 이 곳에서 수업을 계속하였다.

또 1951년 12월 31일 교육법 시행령(문고 제1194호)에 따라 연구과를 폐지 개편하게 되었지만 신학교 운영상 6년의 교육과정을 고수해 왔다. 1953년 9월 15일 서울로 복귀하여 다시 정상교육을 시작하였고, 1954년에는 의학부를 증설하였다. 1959년 교명(校名)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의학부와 신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60년 대학원 석사과정의 설립 인가를 받고, 1961년 대학원 박사과정의 설립 인가를 받고, 1961년 대학원 박사과정의 설치 인가를 받았다. 성직자 양성이라는 특수목적으로 설립된 가톨릭대학 신학부는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입학을 허가하고, 극히 소수의 졸업생, 즉 성직자를 배출해냈다. 예수성심신학교 때 89명, 경성천주공교신학교때 21명, 성신대학 및 가톨릭대학 신학부 때(1981년 5월 현재) 656명의 졸업자를 배출하여 총 766명에 지나지 않으나 이들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발전해왔다. 이같이 제한된 숫자이긴 하지만 이들 중 3분의 1 이상이 해외에서 전문분야의 교육을 다시 받았다. 1971년부터 성직 희망자가 아니더라도 가톨릭신학릉 전공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고, 1974년부터는 여학생의 입학도 허가하였다. 부속 연구기관으로는 고전라틴문학연구소, 사목연구소(司牧硏究所), 성서연구소(聖書硏究所), 중세사상연구소 등과 도서관이 잇고, 현재 대학지(大學誌)로는 <알마 마테르>(Alma mater), <가톨릭대학보>,《가톨릭대학논문집》등이 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다.

2. 가톨릭대학 의학부 : 1954년 문교부로부터 증설 인가를 얻어 의예과 2년과 본과 4년를 설치하여 같은 해 5월 3일 서울 명동성당 구내에서 개교하였다. 설립 당시의 정식명칭은 성신대학의학부였으나 1959년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초대 의학부장은 윤형중(尹亨重) 신부로서 의학부가 설치된 직후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에서 운영하던 명동에 소재한 성 요셉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양하여 의료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뒤 부속병원도 꾸준히 발전하여 현재 11개의 부속병원을 갖고 있으며, 1962년에는 의학부 및 부속병원을 총괄하는 가톨릭중앙의료원으로 기구를 통합 개편하여 의학교육과 임상교육에 실효를 기하게 되었다.1968년에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학교교사와 병원건물, 연구소 등을 집약시킨 종합 캠퍼스를 개획하여, 제일 먼저 강남성모병원을 신축하였고 교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1954년 설립된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를 전신으로 한 의학구부설 간호학교가 1962년 신설되었고, 1963년에는 간호학과로 승격 인가되었다. 현재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에 성모병원, 강남성모병원, 의정부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산업재해병원, 여의도성모병원, 성 바오로병원, 성 빈센트병원, 성가병원, 대전성모병원, 성모자애병원, 등 11개 부속병원과 포항성모병원을 자매병원으로 하고있으며, 1969년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수술, 1975년 혈액은행의 개설, 1967년 중앙안은행(中央眼銀行) 개설, 1975년 가톨릭가족계획클리닉 설치 등의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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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상 [한] ~大賞

1982년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제정한 상(賞). 사랑릐 실천, 정의의 구현, 그리고 인류문화 창달을 위해 사회안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찾아 표창하는 것이 그 취지이다. 사랑, 정의, 평화 등 세 부문에 걸쳐 시상되며,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후보자들을 추천받아 시상자를 선정한다. 1983년 제1회 가톨릭대상은 사랑대상에 김수련(金水蓮, 세실리아), 사랑차상에 이풍순(李豊順, 모니카) 등이 시상되었고, 1984년 제2회 가톨릭대상은 사랑부문에 허순덕(許順德, 데레사), 문화대상에 김윤주(金允柱, 아우구스티노) 등이 시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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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농민회 [한] ~農民會 [영] Catholic Farmer’s Movement [관련] 한국가톨릭농민회

농민 스스로의 단격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54년 유럽의 8개국 18개 운동단체들이 가톨릭농민회 국제연맹(Mouvement International de la Jenesse Agricole et Rural Catholiques)을 창설하였다. 1958년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고, 유엔의 주요 기구들에 의해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는 정회원국이 5대륙에 걸쳐 있으며 4년마다 국제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대륙별로는 대륙회의를 개최하며 벨리에 루벵에 국제본부를 갖고 있다.

한국 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노동 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J.A.C.) 창립총회를 가진 뒤 1970년 9월 제7차 가톨릭농민회 국제연맹(MIJARC) 총회에 대표자를 파견, 정회원국으로 가입함과 아울러 1972년 3월 제3차 전국 대의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농민회’로 정식 출범하였다. 그 뒤 같은해 10월 바티칸에 소재한 국제 가톨릭농촌단체협의회(I.C.R.A.)에 가입하는 한편, 1973년 2월 한국 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에 가입하여 농촌에 있어서 새로운 평신도사도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각 지역별 연합회가 창립되기 시작했고, 1973년 7월 경기연합회가 창립된 이래 1978년 12월에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됨으로써 모두 10개의 지역별 연합회의 창립을 보았다. 1975년 9월 전국 지도신부단이 구성되었으며, 1976년 3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준을 받았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민문제의 기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그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상실, 농촌오염, 투기자본의 농토 잠식, 부실경지 정리로 인한 문제 등으로부터 농민보호활동을 추진하며 영세한 농업구조가 안고 있는 불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각종 협동활동을 추진하여 협동의식을 높인다. 둘째, 농산물에 대한 정당한 값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활동한다. 셋째, 농업관계 조합장 선거제 실시 등 실제적인 조합운영의 활동을 제시한다. 넷째, 민주적인 농업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장을 위한 농림 관계법의 공청회를 유관 단체와 함께 개최하여 자주적인 농민의사와 법이 잘 화합할 수 있도록 활동한다. 다섯째, 농민들의 진정한 생산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농민문화 부활을 위한 활동을 한다. (⇒) 한국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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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노인학교 [한] ~老人學校

노인의 사회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가톨릭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한국의 가족제도도 대가족제에서 핵가족제로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노인들의 정신적 경제적 소외가 심화되어 각종 노인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불어닥친 근대화 바람은 노인문제를 더욱 심각한 것으로 만들었다. 가톨릭교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으로 문제화 된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 본당별로 노인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하였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80년 ‘천주교 서울 대교구 노인학교연합회’를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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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노동청년회 [한] ~勞動靑年會 [영] Young Christian Workers [프] Jeunesse Quvriere Chretienne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청년노동자로 구성되어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청년노동자의 손으로, 청년노동자를 위하여 노동계를 그리스도적인 생활양식을 만들고자 하는 회(會)로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 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일상생활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하루하루의 생활환경 속에서 동료 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만 한다. 세째, 청년노동자들에게 고동적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할 상황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벨기에의 카르딘(Joseph Cardijn) 신부에 의해 이 회가 시작되었는데, 카르딘 신부는 브뤼셀에서 가까운 마을의 노동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진학을 못하고 노동을 하다가 노동자를 위한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여 신학교에 입학한 뒤 1906년 사제서품(司祭敍品)을 받았다. 오늘날과 같은 운영 형태는 1차 세계대전 중 옥중생활 속에서 착상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그는 곧 ‘Jeunesse Syndicalist’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이 모임의 이름으로 정기간행물까지 발간하였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빠른 속도로 벨기에 전역에 확산되었으나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않았다. 마침내 1925년 벨기에 주교단과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인정을 받아 1925년 4월 18일 가톨릭노동청년회(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창립 총회를 갖고 국가적인 조직체로 육성할 것이라는 정관도 채택하였다. 1927년부터는 세계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이 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한편, 확고한 기반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견지에서 국제적인 정관을 채택하지 않다가 1957년에 가서야 이를 채택하게 되었으며, 1981년 현재 125개국에 약 700만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는 1958년 11월 14일 창설자 카르딘 추기경의 내한을 계기로 1958년 11월 16일 간호원 9명과 박성종(朴成鍾) 지도신부가 함께 모여 결성되었다.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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