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복 [한] 占卜 [라] divinatio [영] divination [독] Wahrsagen

어떤 표시를 실마리로 점을 쳐서, 과거 현재의 숨겨 있는 사실, 장래의 일을 알아내고 판단하는 술법을 말한다. 점을 치는 술법이나 방술(方術)을 지칭하는 ‘점복’을 ‘복점’(卜占), 점술(占術) 또는 복술(卜術)이라고도 부르며, 특수한 자연현상 또는 인간현상의 고찰에 의하여 미래의 일이나 운명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 길흉(吉凶)을 판단하고 예견하여 감추어진 초자연적인 세력의 의사를 알려는 방술로서, 소극적 수동적인 점이 주술(呪術)과 다르며 표시(점복)와 정보(길흉예견)와의 관계가 경험과학적으로가 아니라, 초자연적 신비적으로 인식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또한 미개사회에서부터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갖가지 목적으로, 이 점복 행위는 널리 온 세계에 행해져 왔다.

비밀 술법 즉 비술적(秘術的)인 힘의 원천에 관해서는, 점복에 사용되는 도구 자체에 힘이 있다고 보는 경우와, 배후에 있으면서 도구를 매개로 삼아 정보를 전달해 주는 신비적인 실재자 곧 어떤 신이나 정령(精靈) 혹은 우주의 이법(理法) 등을 빌어다가 성립시키고 있다.

이상의 어떤 경우든 간에, 점복은 늘 종교적인 성격을 띤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요소가 결핍되어 있을 때, 예를 들면 천문학, 일기예보 등 과학적인 탐구의 경우는 점복이 아니다. 점복에 있어서의 비밀 술법 즉 비술적인 힘은 항상 창조되어진 이성적인 힘이며, 이를 교회는 ‘악마적인 힘’이라고 보고 있다.

점복에 의한 판단에는 악마의 도움을 구걸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장래의 불확정한 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신만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가 이를 알고 있다는 신념에 점복이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점복은 하느님에 대한 중죄가 된다. 역사에서는, 모든 형태의 점복이 교회에 의해서 배척되어 왔다. 이를테면 길흉판단(augury), 도끼점(axinomancy), 화살점(belomancy), 성서 등을 열어서 점치는 책점(bibliomancy), 연기점(capnomancy), 손금점(chiromancy), 강령술(降靈術, necromancy) 등이다. 성서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점쟁이가 있으면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하다”(레위 20:27)고 하여 어떤 형태의 점복이든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고대에서 이를 국가적으로 다룬 중국의 경우, 오늘날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점복은 귀복(龜卜)즉 거북점인데, 이는 은(殷)나라의 ‘갑골점법’(甲骨占法)으로서, ≪하도낙서≫(河圖洛書)에서 유래한 점법이다. 거북의 등껍질을 사용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의한 괘(卦)를 만들어 점을 쳤음을 표시하고 있으며, 점복의 내용도 정치 · 경제 · 군사 ·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쳤다.

그러나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인 ‘역점’(易占)은 전국시대 말엽에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오행, 팔괘(八卦), 육효(六爻) 따위의 특정 방법으로 점을 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족국가인 부여(扶餘)에 우제점법(牛蹄占法)이 있어, 소를 죽여 그 발톱이 합치면 길하고, 붙이면 흉한 것으로, 국가 길흉을 점쳤으며, 처음엔 왕의 임무였으나 뒤에는 특별 담당관을 두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점천대’(占天臺)가 있었고, 서운관(書雲觀)의 관리 중에 ‘복박사’(卜博士)를, 태복감(太卜監)에도 ‘복정’(卜正)이 있었다. 조선조에는 관상감(觀象監)에 점복 등을 관장시켰으며, 정다산(丁茶山)의 저서 중에는 ≪복서통의≫(卜筮通義), ≪역학제언≫(易學諸言)등 점복에 관한 것이 있어 왔고, 실증과학의 진보나 종교사상의 발전이 눈부신 오늘날에도 점복은 민간의 풍속 가운데 잔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F. Lenormant, La divination…chez les Chaldeens, Paris 1875 / Bouche-Leclercq, Histoire de la divination dans l’antiquite, t.4, Paris 1879∼1881 / F. Walter, Aberglaube und Seelsorge, v.2, 1911 / W.A. Lessa, Somatomancy: Precursor of the Science of Human Constitution, 1952 / R. La Roche, La Divination: Avec un supplement sur la superstition en Afrique Centrale, Washington 1957 / 白川靜, ト辭の世界, 貝塚茂樹編, 古代殷帝國, 1985 / G.K. Park, Divination and its Social Contexts, 1963, W.A. Lessa & E.Z. Vogt, eds., Reader in Comparative Religion: An Anthropological Approach, 2ed., New York 1965 / A. Caquot, ed., La Divination, 1968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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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2 [한] 節制 [라] temperantia [영] temperance [관련] 절덕

모든 쾌락의 욕망을 억제하는 덕의 하나. 가장 넓은 의미로는 모든 형태의 즐거움, 예컨대 지적인 활동에서 생기는 순전히 정신적인 즐거움, 기도할 때 느끼는 위안,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혹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 때 느끼는 즐거움까지도 억제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인내의 덕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커다란 공포를 참아내는 인내의 덕과 같이 절제의 덕은 쾌락에 대한 욕망을 참아내는 것이다. 쾌락은 자연스러운 인간활동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런 인간활동일수록 가장 강렬하고, 인류에 있어서는 성욕과 관련된 쾌락이 가장 강렬하다. 절제의 덕은 이러한 생리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 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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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1 [한] 節制 [라] abstinentia [영] abstinence [관련] 금육재 단식재

영적인 발전을 위해 음식물의 종류나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거나 억제하는 덕(德)의 하나로 개인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억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교회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의 완덕(完德)을 추구하는 수도회에는 회칙에 절제의 규정이 있다.

절제는 애당초 삼가야 할 음식물의 종류를 종하고 그러한 음식물을 먹지 않은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유태교에서는 절제하여야 할 음식물에 대해 상세하게 규정해 놓아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신약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우상에게 바쳐져 더러워진 것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먹지 말라는 규정(사도 15:20)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지되고 단식이나 금육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St. Antonius)와 그의 제자들과 같은 은수사(隱修士)들은 엄격한 절제를 지켜 빵 · 물 · 소금 이외의 모든 음식물은 먹지 않았고, 단 많은 관상수도회(觀想修道會)에서는 오늘날까지 엄격한 절제를 지키고 있다. (⇒) 단식재, 금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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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순교기념관 [한] 切頭山殉敎紀念館 [관련] 양화진순교기념관

⇒ 양화진순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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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한] 切頭山

순교사적지.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그 모양이 누에 또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 혹은 용두봉(龍頭峰)이라 불렸고,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렸다. 양화진 나루터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산수가 좋아 조선시대의 풍류객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이 평화스런 봉우리의 이름이 절두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병인(丙寅)박해(1866년) 이후의 일이다, 당시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 때 살아남은 프랑스 성직자 리델(Ridel, 李) 신부가 조선을 탈출, 청(淸)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프랑스의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 해 9월 프랑스는 2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조선을 정찰케 하였다. 이 군함이 강화해협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 앞에까지 당도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 프랑스 군함이 물러나게 하였다. 그 뒤 10월에 프랑스 군대가 전력을 증강, 다시 강화도를 공격함으로써 이른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 때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렵혀진 땅을 천주교인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박해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프랑스 군함이 정박했던 양화진 근처의 잠두봉은 천주교인의 처형지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로써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을 위시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가 봉우리를 적셨고, 이 봉우리의 이름조차 절두산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절두산은 한동안 잊혀진 땅으로 버려져 있다가 1956년 한국순교자현양회에 의해 매입되었고, 병인순교 100주년을 맞은 1966년 기념 성당과 순교자기념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곳 순교자기념관은 초기 교회 창설에 힘썼던 이벽(李檗),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등의 유물을 비롯한 많은 유품과 순교 성인들의 유품과 유해를 소장하고 있다. 그 밖에도 귀중한 교회사료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으며 기념관 앞 광장에는 성인 남종삼의 흉상 및 사적비, 일본에서 순교한 오따 줄리아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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