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지나 [원] Indo-China [한] 印度支那

아시아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인도지나 반도에는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 등 국가가 있다. 16세기부터 유럽인의 침략을 받았고 19세기 말부터 프랑스령 인도지나로 되었다가 2차 대전 뒤 각각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권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와 싸운 독립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만큼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날을 지새웠다.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1615년. 예수회 수도사들이 안남(安南)[지금의 베트남]에 상륙하여 선교를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초기 선교에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은 예수회 수사 로드(P. Rhodes). 그러나 이후 7-8차례 일어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고, 박해는 프랑스의 인도지나 지배가 확립된 후에야 그쳤다. 여러 수도회들이 진출, 교회조직을 정비하고 교육 · 문화 · 의료시설을 설치하여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교활동지의 하나가 되었지만 주민들의 뿌리깊은 배외심을 불식하지 못하였다. 현재 인도지나의 종교현상에 관해 정확한 통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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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원] Indonesia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 3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이다. 면적은 190만 4,569㎢, 인구는 약 1억 5,303만명(1982년 추계)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네덜란드령 동(東)인도였으나 1945년 8월 17일 독립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스도 교도는 36만 3,000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며, 34개의 교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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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한] 印度 [원] India

아시아 대륙의 남부 히말라야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대륙의 반도. 면적은 329만km2, 인구는 약 7억 1,160만명(1982년 추계)이다. 50년경 사도 토마스에 의해 처음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포르투갈이 고아를 동방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으면서부터였다. 1500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인도에 들어왔고 이어서 예수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이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 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자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는 이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는 포르투갈인을 통해 선교하던 형태를 지양하고 직접 선교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현재 인도에는 110개의 교구가 있으며 1,220만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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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라] Innocentius

Innocentius, 1세(?~417). 교황(재위 : 401~417). 이탈리아 알바노 태생. 고대 교황 중에서 가장 유능한 교황의 한 사람이며, 교황권의 확대 강화를 꾀하였다.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므로 모든 교회가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첫째로, 지방교회 회의에서 파면당한 성직자(聖職者)도 교황청에 상고(上告)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오크회의(403년)에서 파면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ysostomus)의 상고를 수리(受理)하여 그를 옹호하였다. 둘째로, 교황에게는 새 교회직무를 창설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 데살로니카의 부주교(副主敎)를 교황 대표자로 지정하였다. 셋째로, 교리에 관한 최종결정권을 교황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단(異端)인 노바시아누스주의를 억압하고, 또한 로마황제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도나투스파(派) 금지령(404년), 마니교도 · 몬타누스주의 · 프리실리아누스파(Priscillianism) 금지령을 반포케 하였다. 또한 펠라지우스(Pelagius) 배격에 관한 카르타고회의의 결의에 허가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서(西)고트왕 알라리쿠스(Alaricus)와 로마황제를 화해시키려고 수도 라벤나에서 교섭 중에 있을 때 로마는 알라리쿠스에게 공략당했는데(410년), 이것은 이교 로마에 대한 신(神)의 심판으로 간주되어, 교회는 그 후에 오히려 융성하게 되었다.

Innocentius, 3세(1160~1216). 교황(재위 : 1198~1216). 원명 Giovanni Lotario de Conti. 트라스문드 백작의 아들. 교황 글레멘스 3세의 조카. 이탈리아의 아냐니 태생. 로마, 파리, 볼로냐에서 공부하고, 글레멘스 3세의 서거로 추기경이 되었다(1190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뒤를 이어 37세의 나이로 교황이 되어 18년간 절대적 권위를 떨쳤다.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교권 절대주의사상을 이어받아 세속군주 및 국가를 억누르고 교황청의 강화를 꾀함으로써 교황 정치는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또한 교황령의 실지 회복에 힘써 루마니아지방을 교회직할로 하고, 안코나, 토스카 등지도 그 소속령으로 넣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한 최초의 교황이며,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도 지배할 권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그 이념에 입각해서 전체 유럽 여러 나라의 국정에 간섭하였다. 즉, 독일황제의 황제위를 둘러싼 분쟁 때(1198년), 황제의 선거권은 각 선거후에게 있으나, 교황은 ‘선출된 사람을 조사할 권리와 권위’(ius et auctoritas examinan야 personam electam)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토 4세를 도와서 그를 로마에서 대관(戴冠)케 하였다(1209년). 그러나 오토 4세가 교황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령(領)을 요구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자신의 피후견인(被後見人)인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앉혔다(1215년). 또한 프랑스왕 필립 2세의 이혼문제에 간섭하여 이혼한 왕비 덴마크의 잉게보르크의 복연(復緣)을 강제로 실현시켰다(1200년). 또 자기가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 랭튼(Stephen Langton)을 거부한 영국의 존 왕을 파문(1213년),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케 하고 신종을 맹세케 한 다음 그 죄를 용서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발칸, 키프로스, 아르메니아에까지 미쳤으며, 유럽 전체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여러 권력위에 교회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제4차 십자군(1202-1204년)을 추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그리스에서 탈환(1204년),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를 개최하여 발두스파(派) 및 알비파를 배격, 프란치스코회 및 도미니코회의 창립을 공인(公認), 구(舊)수도회를 개혁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회의 수령으로서 교황의 위치가 확립되어, 교무(敎務)와 정무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정의의 왕’ 즉 멜키세덱으로 상징되는 왕인 제사(祭司)의 이념을 실현시켰으며,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초래하였다.

Innocentius, 4세(?~1254). 교황(재위 : 1243~1254). 1200년 제노아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교회법 교수로 명성을 얻었다. 1227년 추기경이 되었고, 1243년 약 18개월간의 공위(空位) 기간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위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분쟁의 최정점을 기록하였다. 즉위 즉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자, 1245년 리용 공의회에서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1254년 콘라드(Conrad) 4세의 사망 후에 비로소 교황과 제국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재위기간 중 루도비코 9세에 의해 영도되는 새 십자군(1248년)을 소집하여 타타르족에게 공격받는 동로마제국을 위해 몽고제국의 칸(Khan)에게 사절을 파견했으며(1245년) 그리스 정교회와 협상을 벌여 그의 생전에 동방이교(離敎)가 종식되는 듯이 보였다. 또한 누미디아(Numidia)와 이디오피아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대칙서 (1252년)에서 이단심문시의 고문을 허가하기도 하였다. 그가 쓴 ≪교령집에 대한 주석≫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Innocentius, 10세(1574~1655). 교황(재위:1644-1655). 원명 Giovanni Battista Pamfili. 로마 태생. 교황청 요직을 역임, 추기경을 거쳐 우르바노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자 교황청에서 바르베리니(Barberini)가(家) 세력을 몰아냈다. 포르투갈의 독립을 반대하고, 베스트팔리아의 화약(和約)에 항의하여 교회재산의 보전에 힘썼으며, 터키인(人)의 공격에 대해 베네치아를 도왔다. 또한 대칙서(1553)를 발표하고, 얀센(C.O. Jansen)의 ≪아우구스티누스≫ 속의 5개 주제(主題)를 비난하여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의 얀센주의 논쟁을 촉진시켰다. 1645년 중국에서의 적응주의를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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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한] 忍耐 [라] patientia [영] patience

일반적으로 인내는 현재의 재난이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인내는 다른 모든 덕을 성취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현재의 악(惡, evil)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하느님의 뜻대로, 슬퍼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덕행이다. 특히 용덕(勇德)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인간이 자연적인 선(善)과 덕(德)을 얻기 위해서 현재의 곤란을 참게 하는 인내는 성취되어지는 덕이다. 이에 비해 성화은총(聖化恩寵)은, 성화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픈 열망에서 고난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견디게 하는, 초자연적인 인내를 불러일으킨다. 이 초자연적 인내는 참된 기쁨을 준다. 성인(聖人)들은 인내로 인해 가장 높은 정도의 기쁨을 맛보았다.

인내는 성서에 사용된 두 측면의 인내를 근거로 한다. 즉 ‘자기 억제’([그] makrothnmia)와 ‘적극적으로 참고 견딤’([그] upomone)이다. 전자는 자제하여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자비와 연민과 관계되며 하느님과 인간과의 양자에 해당된다.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시며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출애 34:6)으로 인간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시다(시편 78:38-39, 103:8, 지혜 11:23, 12:8-10, 로마 2:4-5, 1베드 1:6). 또한 전자의 인내는, ‘성령의 열매’(갈라 5:22)로 믿음을 정화시키고(1베드 1:6) 희망을 길러주며(로마 8:25, 15:4) 완덕으로 이끄는(야고 1:4) 것으로 특히 하느님의 일꾼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인내를 권고하였다(1디모 6:11, 2디모 2:24, 3:10).

이에 비해 후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강조되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구약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희망’(예레 14:8, 17:13)이라 불려졌고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고통을 견디는 인내만이 인간의 삶을 열매맺게 할 것이라 하였다(루가 8:15). 그래서 성 베드로는 부당한 고통도 견디라고 권고했고(1베드 2:19-30), 성 바울로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였다(로마 5:3, 1고린 4:12, 2고린 1:6). 현세에서 신자들의 삶은, 위대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복된 희망의 날(디도 2:14)을 기다리는 인내의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참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10:22).

인내는 보편적이고 겸손하며 초자연적이라는 세 특성을 갖는다. 즉 인내는 어떤 이유에서 생겨나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모든 종류의 악을 견딘다. 인내는 부당함을 불평하거나 관심과 동정을 구하지 않을 때 겸손하다. 인내는 애덕으로 성취돌 때 초자연적이다. 한편 인내에 반대되는 것은 ‘무감각증’과 ‘참지 못함’이다. 전자는 감정의 부족을 말하며 자신과 타인의 고토에 냉담하게 만든다. 후자는 덕의 성취에 필수불가결한 곤란을 참는 것을 거절하여, 외적으로는 분노와 불평, 좌절 등으로 나타나며 내적으로는 시련에 대한 반감과 지나친 자기 방어로 나타난다. 이 두 악덕(惡德)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하여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전주곡이 되는 고난과 슬픔을 회피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내는, 내적 불평 없이 곤란을 견디는 것, 곤란을 덕의 진보로 사용하는 것, 하느님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열망하여 영신적 기쁨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 등의 세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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