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 [한] 李恒老

이항로(1792~1868).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척사론자.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이회장(李晦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천자문을, 6세 때 십팔사략(十八史略)을, 12세 때 상서(尙書)를 각각 떼고 17세 때인 1808년(순조 8년)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과거(科擧)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는 이후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1840년(헌종 6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했고, 1862년(철종 13년)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때 김순성(金順性)의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가 되고 이어 전라도 도사(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한 후 1866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병인박해 때에는 휘하의 문인(門人)들과 강력한 척사론을, 병인양요 때에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그 후 공조참판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대원군의 경복궁중건과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이로 인해 사망할 때까지 대원군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이항로의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고, 또 직언자(直言者)로 존왕양이의 대의명분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화서집≫(華西集),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 ≪벽계아언≫(蘗溪雅言), ≪주자대전집차의집보≫(朱子大全集箚疑輯補), ≪주역석의≫(周易釋義), ≪문인어록≫(門人語錄), ≪벽사록변≫(蘗邪錄辨) 등이 있다. 저서 중 ≪벽사록변≫에는 그의 척사론이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학문적 근거보다는 고루한 존왕양이의 대의명분 위주로 척사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편협하고 비합리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사후 내부대신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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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합규 [한] 李鴿逵

이합규(?~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노비(奴婢) 출신으로 모친에게 문교(聞敎)했고 황사영(黃嗣永)이 주도하던 명도회(明道會)에 가입, 홍필주(洪弼周)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축일을 지내고, 매월 7일 김이우(金履禹)의 집에서 오현달(吳玄達)을 비롯한 몇몇 교우와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이해 5월 14일(음 4월 2일) 정철상(丁哲祥), 최필제(崔必悌)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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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권 [한] 李太權

이태권(1781~1839).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1791년 포졸에게 잡혀 수감되었다가 배교로 석방되었다. 이 때 아버지 이무명은 동생 이여삼과 함께 전라도 금산(錦山)으로 피신하였으나, 금산에서 1801년초 잡혀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 때 이태원도 다시 체포되어 그들은 공주감영으로 다시 이송되어 아버지는 전라도로 유배되고, 이태권과 숙부 이여삼은 석방되었다. 1810년 전라도로 유배된 아버지는 1804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이태권은 공주로 갔으나 그 곳에서 다시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렇듯 그는 심약하여 배교로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 뒤로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켰다. 1827년 그는 세 번째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투옥되었는데, 이번에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리하여 10여년에 걸친 옥중생활을 이겨 나가 1839년 5월 29일 58세로 평소에 바라던 참수치명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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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원] Italy

지중해 중앙부, 북서에서 남동으로 약 1,200㎢에 걸친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두 섬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공화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면적은 30만 1,225km2, 인구는 약 5,674만명(1982년 추계)이다. 57년 혹은 59년에 로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는 네로의 박해가 극심하여 교회는 지하교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313년 그리스도교가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으며 로마의 주교들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뒤 로마는 서방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로 그 권위를 확고히 다졌다. 중세의 이탈리아는 교황, 황제, 국왕, 도시국가간의 제휴와 대립 속에서 성장해 왔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등지에 개혁교회가 세워졌으나 가톨릭개혁과 예수회의 활동으로 그레고리오 13세 때에 다시 가톨릭국으로 복귀하였다. 근대에 발생한 국가 통일운동은 ‘자유국가에 자유교회’라는 구호 하에 가톨릭의 비국교화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가톨릭 교회는 1871년 레오 13세의 회칙으로 그들의 반대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라테란조약에 의해 가톨릭은 다시 국교로 인정되고, 이탈리아정부는 바티칸시국의 주권이 교황청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282개의 교구가 있으며 국님의 98%인 약 5,532만 2,000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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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훈 [한] 李致薰

이치훈(?~?). 이승훈(李承薰)의 아우. 서울에서 이동욱(李東郁)의 2남으로 태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조정에 천주교 탄압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천주교인인 형 이승훈에게 배교를 강요, 이승훈을 배교시켰다. 그러나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이 일어나자 천주교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승훈과 함께 체포되어 거제도(巨濟島)에서 유배 중,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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