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가다2 [한] 李~

이아가다(178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성인 이호영의 누나.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모친, 동생과 함께 입교했고 그 후 부친이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1835년 2월(음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에서 동생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고통스러운 옥중생활 중에도 동생과 함께 한 날 한 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끈기로써 생활하여 동생에게 먼저 순교의 영광을 얻게 하고 자신도 동생이 옥사한지 6개월 되던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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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가다1 [한] 李~

이아가다(1823~1840).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성인 이광헌(李光獻)과 성녀 권희(權喜) 부부의 딸.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표양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수정(守貞)을 결심하여 수계범절에 소홀하지 않았다. 기해(己亥)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되돌려 보내졌고, 포청에서 다시 배교를 유도하는 간계를 물리치고 옥에서 만난 김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 나갔다. 9개월 동안 곤장 300대, 대곤 70대를 맞고 드디어 1월 9일 포청 옥에서 김데레사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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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오언 [한] 二十五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예수회 선교사 리치(Matteo 꺛챠, 李瑪竇)의 저서로 1604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간행되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것을 추출, 25가지로 요약하여 실었는데 풍응경(馮應京)의 서(序)와 서광계(徐光啓)의 발(跋)이 수록되어 있다. 이지조(李之藻)의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잡가류부(雜家類部)의 목록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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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론 [한] 理神論 [라] deismus [영] deism [독] deismus [관련] 범신론

하느님의 존재를 순수한 이성에 의해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초자연적 존재라는 것을 블라운트와 같이 부정한다든가, 흄처럼 의심한다든가, 볼테르나 루소와 같이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 설. 그들은 계시 · 기적 · 은총 · 신비 등은 이른바 ‘이성적인 사람’한테는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신론은 인격신(人格神)을 인정하고, 자연종교를 인정하지만 초자연계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도 다르다.

이신론에 의하면 우주, 세계는 일단 창조된 다음에는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 작용하며, 자기전개(自己展開)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종교에서 기적 등의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신앙을 오직 이성으로만 인정하는 범위 내에 한정시키려는 사고방식이다.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걸쳐 영국의 자연과 학자와 자유사상가들에 의해 주장된 다음, 프랑스와 독일의 계몽사상을 강력히 지배한 신관(神觀)이며 사조였다. (⇒) 범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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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규 [한] 李身逵

이신규(1794~1868).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 정약용(丁若鏞)의 생질이 된다. 아버지 이승훈이 사형당한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어 그 뒤 인천(仁川)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까지 살았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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