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임 [한] 李時任

이시임(1782~1816). 순교자. 세례명 안나. 충청도 덕산(德山) 높은 뫼(현 지명은 忠南 禮山郡 古德面 夢谷里)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하여 오빠 성지(일명 儒震), 동생 성삼(일명 儒定)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혼기에 이르러 수정(守貞)을 결심한 후 동정녀(童貞女)들이 한 곳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을 찾아 집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박(朴)씨라는 한 사공에게 겁탈당하여 그와 결혼, 아들 하나를 낳았고 몇 해 뒤에는 과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15년 경상도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30여명의 마을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안동진영(安東鎭營)으로 압송되었고 그 곳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대구감영에서 다시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이듬해 11월 8일(음) 김종한(金宗漢),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 김화준, 김희성(金稀成), 최성열(崔性說) 등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후 1827년에는 동생 이성삼이, 1832년에는 큰오빠 이성지가 각각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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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목장 [한] ~牧場 [영] Isidore Farm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의 1236.5ha의 대지위에 소 170여 마리, 면양 1700여 마리, 돼지 3800여 마리의 이시돌목장은 1961년 11월 맥글린치(Patrick McGlinchey, 임피제) 신부에 의해 개설되었다. 현재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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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한] ~農村産業開發協會 [영] Isidore Development Association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대림리에 위치한 본 협회는 천주교 한림교회의 주임신부 맥글린치(Patrick McGlinchey, 임피제) 신부에 의해 1962년 10월에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농 · 축산분야의 개량사업을 통한 농촌발전을 도모, 축산물의 증산장려, 사회사업, 육영사업을 그 설립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산하에 이시도르목장, 사료공장, 수직사, 이시도르의원, 이시도로회관, 양로원, 경로당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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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로 [라] Isidorus

Isidorus(560?~636). 성인. 세빌랴(Sevilla)의 대주교. 교회학자. 축일은 4월 4일. 이시도로(Isidorus)의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트족(Goths)이 카르타제나(Cartagena)에 침입해 왔을 때 가족들은 세빌랴로 이주, 그는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뒤에 세빌랴의 대주교가 된 형 성 린더(St. Leander)의 감독하에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이 동안에 백과전서적인 지식의 기초를 확립, 아리아니즘(Arianism)에 대항하여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갔고, 600년경 형의 뒤를 이어 세빌랴의 대주교가 되어 학교와 수도원을 세우고 유태교인들의 개종을 위해 일하는 등 스페인 교회와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주요한 스페인의 교회회의(Councils)를 주관했는데, 톨레도(Toledo) 4차 회의(633년)는 특히 유명하다. 1598년 시성되었고 1722년 교회 학자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의 저서는 중세기 많은 저술가들이 인용하는 지식의 보고가 되었다. 특히 ≪Etymologiae≫는 당시의 교회와 신학적 문제는 물론 문법, 수사학, 수학, 의학, 역사 전반에 걸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Sententiarum libri tres≫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관한 편람서이며, ≪De ecclesiasticis officiis≫는 수도원의 권리와 의무, 전례에 관한 것이다. ≪Synonyma≫, ≪Chronica Majora≫, ≪Historia de Regibus Gothorum, Vandalorum et Suevoru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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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한] 李承薰

이승훈(1756~1801).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중의 한 사람.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 그곳의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湯士選,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池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鞫廳)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1979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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