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한] ~敎 [영] Islam

서남아시아에서 나온 유일신적 종교 가운데 인류역사의 무대에 가장 뒤늦게 등장한 최후의 세계적 종교이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반도의 홍해안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가르침은 경전인 코란(Quran, 續經) 속에 들어있다. 코란은 교조(敎祖) 무하마드(Muhammad, 570년경~632)가 예언자로 자처한 40세 때부터 사망시까지 수시로 받은 계시를 수록한 책이다. 예언자는 10여년간 그의 고향인 메카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성공은커녕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622년에 메디나로 이주(hijra)하였다. 이 해가 곧 이슬람력(曆)의 시작인 히즈라 원년이다. 이때부터 이슬람은 급성장하여 예언자의 사망시까지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메디나에서 무하마드는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공동체(Ummah)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 공동체는 단순한 믿음의 공동체만이 아니고 스스로의 법제(法制) 성부 및 사회체제를 구비한 공동체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 때문에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국가인 것이다. 그것도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일원적인 것으로 그 추종자(muslim)는 보는 것이다.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정복을 개시하여 교조가 죽은 뒤 백년도 채 못 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중국접경과 인더스강 유역에서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서쪽으로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정복지 가운데 스페인을 제외한 지역은 무슬림 다수지역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 뒤 정복에 의한 포교보다 무역을 통한 포교활동으로 이슬람은 동남아시아 즉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과 검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유럽의 발칸지역과 중국의 신강성 지역에도 진출했으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슬람의 선교사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 세계 총인구의 6분의 1을 무슬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1. 교리(敎理) : 무슬림의 믿음과 사상이 명시되어 있는 쿠란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무하마드에게 아랍어로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본다. 예언자의 사후 새로운 계시가 끊어지고 쿠란만으로는 새로운 사태의 해결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미흡함을 느끼자 무슬림은 이를 보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무하마드는 절대과오를 범하지 않는 완전한 인간으로 전제하고 그의 생애에 착안하여 일여건 아래 그가 취한 행동과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입법(立法)의 자료로 삼으니 곧 하디스(Hadith, 傳承)이다. 따라서 무하마드의 관행(慣行, sunnah)은 독실한 신자들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된다고 보고, 스스로를 관행의 추종자(ahl al-sunnah)라고 부르니 곧 무슬림의 8할 이상을 점유하는 수니(sunni)파이다.

이슬람에서 무하마드의 중요성은 무슬림의 신조 가운데 신조인 신앙의 고백(shahada, 證言)즉 “알라(Allah,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자(使者)다”란 두 구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구절은 심지어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속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이며 쿠란 속에 함께 나란히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한 구절씩 분리되어 자주 나타난다. 이 두 구절을 외우는 것은 곧 스스로 자기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행위이며 또한 하느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구분은 물론 다른 종교의 추종자와 무슬림이 구분되는 것이다. 즉 무하마드 는 단순히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 보낸 마지막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가 받은 계시는 완벽하며 절대 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그는 역사적 인물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하디스를 통하여 무슬림의 마음속에 마치 현실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공정하고 따뜻한 스승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코란은 114장(sura)으로 되어 있으며 제1장을 제외하고는 그 길이가 긴 것부터 짧은 것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슬람의 신조는 6신 5행(六信五行)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섯 가지 믿음(iman)에는 알라, 천사, 예언자, 성서, 최후의 심판 및 천명(天命, gadr)이 있다.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물론 어떠한 동반자도 있을 수 없다. 절대신(絶對神) 알라는 세계 도처의 각 민족에게 필요시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보낸다. 이들 예언자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거쳐 무하마드에서 끝이 난다.

코란 3장 66절에서 아브라함은 유태교인도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순수한 무슬림[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이어서 알라에게 동반자를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은연중에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구약성서와 신약성서)으로 혼탁해진 유일신사상을 이슬람이 쇄신하여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순수한 유일신사상을 다시 희생시켰음을 보이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언자로 보는 점이 특이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천명(天命)의 원리에서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절대영역인 창조에 대한 침범으로 보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헌신적 행동(islam 순종, 또는 ibadat 헌신)에는 신앙의 고백, 예배, 종교세(zakat), 단식, 순례가 있다. 신앙의 고백은 신자가 자기 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것이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의 카바(kaabah) 신전에 있는 검은 돌을 향하여(qiblah)[예배의 방향] 행하며, 금요일 오후 1시경에는 성원(聖院)에서 집단예배를 가진다. 전세계 무슬림이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는 것은 무슬림의 유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식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Ramadhan)의 한 달 동안에 병자, 임신부, 여행자를 제외한 성인남녀 신자 모두가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지 않는 완전한 금욕행위를 말한다. 재력이 허용되는 신자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 세웠다는 메카의 카바신전과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 등의 성지순례를 이슬람력 12월에 해야 한다. 이 순례를 의식에 따라 마친 신자는 하지(hajji)[순례를 행한 이]라는 칭호가 그 이름 앞에 공식적으로 붙게 되며 이것도 무슬림의 세계적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종파 :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합일되어 있기 때문에 종파의 발생도 정치적 투쟁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예언자의 사후 그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그의 동료(sahabah) 가운데 일부는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Ali)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역한 친구이며 연장자인 아부 바르크(Abu Bakr)를 할리파(Khalifah, 후계자)로 추대하였다. 결국 알리는 네 번째 할리파로 선임되었다. 뒤에 그의 추종자들은 정치적 파당에서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켜 그를 완전무결한 인간(imam)으로 승화시키니 곧 시아(shi‘a, 무리)파이다.

이에 반하여 알리를 포함하여 그의 세 선임자 모두를 받아들여 즉 이루어진 관행을 그대로 인정하는 파가 정통파인 수니파이다. 시아파는 카리스마적인 개인인 이맘(imam)[앞에 서는 이, 즉 지도자, 또는 집단예배 인도자]을 공동체의 핵으로 보는 대신에 수니파는 카리스마적인 움마를 내세웠다. 전자는 무하마드의 완전무결성(‘ismah)이 알리를 통하여 그 자손인 이맘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나 후자는 움마가 이어받았다고 믿었다. 양파의 이슬람 교리논쟁을 통하여 이슬람신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수니파는 집권세력으로 그리스철학의 논리를 받아들여 그 신학을 체계화시켰고 시아파는 이슬람 등장 이전에 서남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신앙과 접목(接木)되어 비교적(秘敎的)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전체 무슬림의 2할도 못되는 시아파의 집권 수니세력에 저항하는 재야세력으로 상당한 기간 존속했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맘이 알리의 자손 가운데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여러 분파가 나왔으나 재야세력으로서의 공통점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즉 비밀결사성, 시아적인 신분을 위험시에 감출 수 있는 가장성, 완전무결한 이맘의 비교적 지식 소유 및 언젠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세주사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시아파는 알리로부터 시작되는 이맘서열에서 제5대 이맘이 누구인가 하는 분규가 발생하여 다섯 이맘파인 자이드(Zaid)파가 분기해 나갔다. 이 파의 추종자는 현재 예멘에 다수가 잔존해 있다. 또다시 제7대 이맘의 적격자 문제로 일곱 이맘파가 분리해 나가니 곧 이스마일(Ism‘ail)파이다. 이 파는 극단적으로 흘러 혁명적 행동주의를 낳았다. 이 파에서 다시 11세기 전후에 활동한 암살단파[hashshashin, 일종의 대마초, 즉 저명인을 암살하기 전에 대마초를 복용했다함. 여기서 십자군을 통해 영어의 assassin이 유래]를 비롯하여, 레바논의 드루즈(Druzes, 일명 Hakimis)파, 시리아의 알라위(Alawis, 일명 Nusairis)파가 파생하였다. 순수한 이스마일파의 추종자는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산재해 있다.

한편 시아파의 대종을 이루는 열두 이맘파는 열두 번째 이맘인 무하마드 알-문타지르(Muhammad al-Muntazir, ?~878)는 죽지 않고 숨어 있으며 언젠가는 구세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 파는 16세부터 이란의 국교로 인정되어 현재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의 각 지역에 살고 있다. 이 파는 이마미(imami)파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흔히 시아파라고 부를 때는 보통 이 파를 지칭한다.

3. 명칭의 유래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하느님께 절대 순종한다는 동명사(動名詞, masdar)이며 그 능동분사가 곧 무슬림(muslim, 절대 순종하는 이)이다. 영어에서 무하마드를 지칭하는 Mohammed에서 Mohammedanism이 파생하여 모하메드교라고도 부르나 이 명칭은 무슬림이 매우 싫어한다. 즉 그들은 알라를 믿는 것이지 무하마드를 믿지 않는다는 논리에 그 이유를 두고 있다. 이슬람교의 우리 고유 명칭은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이다.

이 명칭은 중국 신강성의 회흘(回紇) 사람들이 믿는 종교란 뜻으로 명청(明淸)대의 중국인들이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당송(唐宋)대의 사료에는 대식인(大食人) 또는 대식국인(大食國人)이란 용어가 회회를 대신하였다. 대식(大食)은 그 어원을 따지면 종교를 가리킨다기보다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들을 타지(Tazi)라 부른데서 당어(唐語)로 음역(音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동의 이슬람교도를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흔히 지칭한 것 같다.

당송대의 중국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을 청진교(淸津敎)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청진교도, 그들의 성원을 청진사(淸津寺)라 불렀다. 회흘지역이 이슬람화되자 명청대의 중국인들은 이 지역을 회강성(回疆省)이라고 부르고, 그 주민들은 회민(回民) 내지 회회인(回回人)이라 부른데서 회교 또는 회회교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이다. ≪고려사≫ 전반부에는 대식이란 명칭이 나타나 고려 후기에 생성된 고려가요에는 ‘회회아비’란 표현이 있다. 고려가 원(元) 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사실상 그 속국이 되자 신강성 지역의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원의 관리로 또는 고려왕비가 된 원의 공주수행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데서 이 표현이 나온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된 삼가(三哥)라는 인물은 ≪고려사≫에 회회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9세기경에 출간된 아랍문헌에는 우리나라가 Sila 또는 Shila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신라(新羅)의 음역임이 분명하다. 즉 신라는 공기와 물이 맑은 나라로서 병자가 들어가면 병이 저절로 치유되며 금이 많은 나라여서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술되어 있다(한국사연구, 1977년 4월 제16호 拙稿, <이슬람文獻에 비친 한국像> 참조). 13세기의 일한조(Ilkhan, 1256~1353)의 재상인 라시드 알-딘(Rashid al-Din, ?~1318)은 그의 저서 속에 Kaoli(高麗의 中國語音譯)를 원의 부마국으로 소개하였다. 조선조의 세종 때에 이슬람력(回回曆)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뒤 유럽국가가 강성해지고 무슬림국가는 상대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이들의 한반도 출입도 끊어졌다. 이와 함께 일부 정착한 대식인이나 회회인의 후손도 동화되어 사라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이슬람교가 다시 들어온 것은 6.25동란 때 터키군을 수행한 이맘[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격]이 한국인과 접촉한데서 기원한다. 현재 서울의 이태원에 본부가 있는 한국 이슬람교중앙연합회는 그 산하에 3개의 이슬람성원을 각각 서울, 부산, 경기도 광주에 두고 있다. 신자수는 수천명으로 추산된다. (金定慰)

[참고문헌] H.A.R. Gibb, Muhammedanism, ed. 2, London 1961 / H. Lammens, Islam, Beliefs and Institution, trans. E.D. Ross, London 1929 / F. Rahman, Islam, Chicago 1966 / Encyclopaedia of Islam, Leyden 1913~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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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원] Israel

‘하느님과 싸우다’ 혹은 ‘하느님은 강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이스라엘이란 말은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성조 야곱(Jacob)에게서 유래되었다. 이사악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 장자상속(長子相續)의 문제로 불화상태에 있던 형 에사오와 화해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가는 도중 어떤 사람과 만나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하며 겨뤘는데, 날이 밝자 그와 겨루던 사람이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니 앞으로는 너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하고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고 떠나갔다(창세 32:23-32)는 기록이 성서에 나오는데 그 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리신 야곱과 그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12지파로 나뉘어진 야곱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란 점을 상기하곤 했는데(창세 34:7, 출애 1:1) 기원전 11세기경에 이르면 가나안을 중심으로 왕국을 세우고, 이를 이스라엘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933년경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 남왕국은 유다라는 국명을 취하였고, 북왕국은 그대로 이스라엘이란 국명을 따랐다. 그 후 남북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레위족의 사제들과 구별하여 평신자만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쨌든 구약시대까지 이스라엘이란 말은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긴 했지만 종속적인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란 말은 종속적인 범위를 넘어선 용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가 ‘간택받은 자’(갈라 6:16)를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있음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하겠다.

한편 신약시대 이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고 있던 유태인들 가운데에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고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47년 서아시아 지방 지중해 연안에다 그들의 국가를 세우고 이를 이스라엘이라 칭하였다. 이 이스라엘은 2만 770km 의 면적에 402만명의 인구를 가진 국가로 주민의 90%가 유태인이며,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1982년말 현재 전국민의 3.2%인 13만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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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 [한] 李順伊

이순이(1781~1802). 동정순교자, 세례명 루갈다, 아명은 유희. 서울에서 부(父) 이윤하(李潤夏)와 모(母) 권씨(權氏)[權哲身의 누이동생] 사이의 2남 1녀 중 장녀로 출생. 어려서부터 어머니 권씨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3일동안 성사를 예비한 후 성체성사를 받고 곧 수정(守貞)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 풍습 때문에 동정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주문모 신부의 허락과 알선으로 역시 동정생활을 원하던 유중철(柳重哲, 요한)[柳恒儉의 長男]과 1797년 동정부부로서 결혼하였고 이듬해 9월 시가(媤家)인 전주(全州)에서 서로 동정서원을 한 후, 남편과 함께 서로 격려하며 끊임없는 극기와 인내로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교하기까지 4년 동안이나 성모마리아와 성 요셉 같은 결혼생활을 하였다.

1801년 3월 신유박해(辛酉迫害) 중 시부(媤父) 유항검과 남편이 소위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된 뒤 전주옥에 갇혔고 이어 10월 18일(음 9월 11일) 국청(鞫廳)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전주로 환송되자 나머지 시댁 식구들과 10월 22일(음 9월 보름)경 체포되어 전주옥에 갇혔고 이어 10월 24일 시부 유항검이, 11월 14일 남편 유중철이 순교한 후 이듬해 1월 31일 (음 1801년 12월 28일) 시모 신희(申喜), 시숙모 이육희(李六喜), 시사촌동생 유중성(柳重誠, 마테오) 등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 어머니 권씨, 친언니와 올케 등에게 보낸 옥중서간을 남겼고 이는 후에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큰오빠 이경도(李景陶, 가롤로)가 순교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서한, 1827년 전주옥에서 옥사(獄死)한 동생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의 일지 등과 합쳐져 ≪누갈다 초남이 일기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해는 순교 후 전주 초남리(草南里)에 안장되었다가 1920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에 의해 중바위산으로 이장되어 유중철, 신희, 이육희, 유중성 4인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佑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출판사, 1979~1980 / 金玉姬, 李루갈다의 獄中書簡과 그 史的 意義, 崔奭佑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柳洪烈,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下, 가톨릭出版社,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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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석 [한] 李順石

이순석(1905~1986). 공예가. 세례명은 바오로, 호는 하라(賀羅). 충남 아산(牙山)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 남대문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에 건너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 도안(圖案)을 전공하고 193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한국 근대 그래픽 디자인의 개척자로서 활약하였으나, 일제(日帝)의 식민지 정책이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 공예부 참가는 일절 거부하였다. 반면, 그는 가톨릭 집안의 미술학도로서 1923년에 서울 중림동 성당을 위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두 상본화(像本畵)를 반신상 유화로 그려 성당 안 양 벽에 걸게 했었으나, 6.25전쟁 중에 파괴되어 없어졌다. 8.15광복 후에는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교수로 지내고, 1969년에 정년퇴임하고는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에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된 종합적인 첫 성미술전(聖美術展)은 장발(張勃)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조직하였고, 그 공예 부문에 <십자가의 촛대>를 출품했으며, 1970년에 서울 가톨릭미술가협회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다음해부터의 회원작품전에 빠짐없이 출품하였다. 순수 작품활동으로는 1947년 이후 1978년까지 국내외에서 9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전(國展)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그밖에 상공미술전(商工美術展)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로 돌공예에 열중하였다. 1961년에 유럽의 현대 공예를 연구시찰한 뒤 제1회 세계공예 회의(1964년, 뉴욕)와 제2회 회의(1969년, 인도)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69년에는 또 독일 시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국제공예전에 대리석 작품 5점을 출품, 우수상에 뽑혔다. 그러한 여러 공로로 서울시 문화상(1955년),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상(1962년), 한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1969년)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적인 성미술 작품으로는 <순교자>(1971), <성모승천>(1973) 등이 있다.

[참고 : 이순석은 1986년 10월 7일 82세로 선종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 청량리 본당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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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 [한] 李睟光

이수광(1563~1628). 조선조 중엽(中葉)의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詩人)으로 실학운동의 개척자. 1563년(明宗 18년) 2월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자(字)를 윤경(潤卿), 호를 지봉(芝峰)이라고 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동자인 태종(太宗)의 7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읽고 16세 때에 이미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했고, 22세 때에는 별시대과(別試大科)에 합격함으로써, 관계에서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는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의 3대에 걸쳐 이조(吏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등의 판서를 위시하여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과 여러 고을의 부사(府使)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전란(戰亂)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또한 재위기간 중 3차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동안, 그곳에서 접촉하게 된 서양학술사상에 관한 지식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시문(詩文)에 능통했던 그는 연행사(燕行使)로 중국 북경에 다녀올 때마다 견문을 넓힘과 아울러 이를 시문으로 적어두고, 북경에서 얻어온 책들을 탐독하여 그 개요를 적어 두었었다. 이렇게 해서 60평생 동안 적어 두고 저술한 책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비롯하여 모두 78권에 이른다.

그의 이와 같은 저술은 그의 생존시부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지봉유설≫은 그 속에서 서양의 여러 나라와 종교를 소개함으로써, 주자학에만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우주관 내지는 인생관을 일신케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교우론≫(交友論) 등 천주교 서적들을 소개하면서 약간의 비평까지도 가해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소개하였는데, 이런 것이 인연이 되어서인지 그의 후손으로 8대손인 이윤하(李潤夏), 그리고 그의 아들 이경도(李景陶), 딸 루갈다 등은 모두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柳洪烈, 李睟光의 生涯와 그 後孫들의 天主敎信奉,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崔奭佑,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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