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논쟁 [한] 恩寵論爭 [라] Controversia de gratia [영] controvercy on grace [관련] 은총론

넓은 의미로 교회사상 은총신학의 여러 측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을 뜻하나 좁게는 도미니코회 학파와 예수회 학파 간에 일어난 ‘도움에 관한 쟁론’(disputatio de auxiliis)을 가리킨다.

초기 교회 때 가톨릭의 은총교리는 최초로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이레네오(Irenaeus)와 오리제네스(Origenes)는 성령의 내주(內住)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각각 강조하여 반박하였다. 또 성령의 신성(神性)을 공격한 마체도니아주의에 대하여 바질(Bazil)과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성령이 성화자(聖化者)이심을 들어 논박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 교회는 삼위일체의 바탕위에서 은총교리를 전개시켰고 하느님의 내주를 부각시키는 경향이었다. 서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가 지니는 역할을 강조한 펠라지우스(Pelagius)에 맞서서 하느님의 은총을 역설하였다. 이 둘의 입장은 은총과 자유의 문제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세기에 베네딕토회원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는 아우구스티노의 예정설을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라바노 마우로(Rabanus Maurus)의 비판을 받았고, 아벨라르도(Aberlardus)가 펠라지우스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고집하다 베르나르도의 비난을 받았다.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 머무르면서 그리스 교회에서 강조된 하느님의 내주를 부활시켰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전혀 무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그 본성이 완전히 부패되고 자유마저 상실했으므로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 구원이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일 뿐이며 인간을 내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에 대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는 기본입장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할 가능성은 인정하고 인간을 향한 인격적인 하느님의 자비(창조되지 않은 은총)가 인간에서 작용을 발한다(창조된 은총)고 한다. 이 공의회 이후 자유와 은총과의 상관성, 특히 조력은총이 자유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는 은총론의 핵심문제로 부각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작용하므로 인간에게 긍정이나 부정의 태도를 표명할 여지를 남기는 한편, 하느님은 인간 자유의 주인이기도 하므로 그 은총은 여전히 효력있는 은총이여야 한다. 즉 영향력 있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할 수 있는 인간 자유의 가능성, 이 둘의 작용이 문제된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은총을 두 가지 유형, 즉 충족은총(充足恩寵, gratia sufficiens)과 효능은총(效能恩寵, gratia eficax)으로 분류함으로써 개념적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전자는 각 인간에게 제공되며 그 은총의 수용여부가 인간의 자유에 좌우된다. 그러나 후자는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거역할 수 없이 당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은총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은총관계를 둘러싸고 몰리나(Lo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학파와 바네즈(Domingo Banez, 1528~1604)를 대표로 한 도미니코 학파간에 다툰 사건이 ‘도움에 관한 쟁론’이다.

양면의 이론들은 사변적인 치밀성을 지니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예수회 학파는 인간의 자유에 고도로 가능한 공간을 부여하며 모든 인간에게 제공되는 은총인 충족은총에 착안한다. 이 은총은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효능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도미니코회 학파는 하느님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효과를 발하는 효능은총에 착안한다. 이들에게 있어 충족은총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이 인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한테서 목표의 이르지 않음을 단정하려는 추상적 상대개념(相對槪念)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의 결과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고 다만 양편에서 극단적인 해결책만이 배격되었을 뿐이다. 즉 만사가 인간의 자유에 좌우되어서 은총은 자신을 자율적으로 성취하는 인간을 돕고 지원하는 기능만을 지닌다는 해결책이 배격되는 한편 만사가 하느님께 좌우되어서 인간의 자유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해결책이 또한 배격되었다.

은총논쟁에서 관건이 된 문제 속에는 이론적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기본 신비가 존재한다.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자립, 무한한 존재와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은총을 새로운 관점에서 발견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 은총론

[참고문헌] C.M. Aherne, Controvercy on Grace,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6, McGraw-Hill, 1967 / Karl Rahner, Structure of de Gratia, Sacramentum Mundi, vol. 1, Burns & Oates, 1968 / G. 그레사케 著, 심상태 譯, 은총, 성바오로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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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한] 恩寵 [라] gratia [관련] 은총론

⇒ 은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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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한] 恩主

일반적인 뜻으로는 은혜를 내린 사람을 ‘은주’라고 한다. 천주교 용어로서는 은혜 또는 은총을 내려 준 주인을 뜻한다. 교회가 은혜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예를 들면 창조라든지 신체의 건강 같은 자연의 선물 이상의 것을 말한다. 즉, 은혜란, 하느님이 자유의지에 의한 친절한 마음에서 이성(理性)을 지닌 피조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제공하는 초자연의 선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주’가 곧 하느님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불자전≫(韓佛字典)에서는 ‘은쥬’(은주)를 ① 친절의 주인 ② 자비로운 주인으로 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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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김대건 신부가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솔뫼에서 이사와 15세 때 마카오로 떠나기 전까지 8년 동안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마을에 이웃한 은이마을은 김 신부가 서품을 받고 귀국한 뒤 공소를 처음 차린 곳이다. 김 신부의 첫 사목지로서 일찍부터 복음이 뿌려진 은이에는 1821년부터 1846년 5월까지 모방(Maubant, 羅) 신부가 사목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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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본당 [한] 殷栗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 남천리(黃海道 殷栗郡 殷栗面 南川里). 은율은 황해도 해안 10개 읍(邑)의 하나로 구월산(九月山)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장 최초의 천주교인은 황중백(黃仲伯)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풍천옥(豊川獄)에서 순교한 후 1870년 경부터 박해 때 살아남은 글라라라고 하는 여자 교우가 전교한 결과 5명의 예비 신자가 생겼다. 은율에서 처음 미사가 봉헌된 것은 1881년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서였다. 리우빌 신부는 1880년 뮈텔(Mutel, 閔德孝, 후에 제8대 서울교구장) 신부와 함께 만주 요동(遼東)에서 뱃길로 장연(長淵)의 태탄(苔灘)으로 상륙, 극락(極樂)의 공소를 근거지로 삼고 은율, 풍천, 장연, 안악(安岳) 네 고을에 전교하였다. 1886년과 1887년에는 쿠데르(Couderc, 具) 신부와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은율지방에 전교하였다.

1887년 로(Rault, 盧若望)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장련(長連)에 도착, 은율에 처음으로 공소를 개설한 이래 은율공소는 본당으로 독립할 때까지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파이아스(Pailhasse, 河敬朝), 빌렘(Wilhelm, 洪錫九) 등 여러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교되었다. 1902년 은율 공소가 설정된 지 15년만에 장연 본당의 관할(1898년부터)을 벗어나 본당으로 독립, 초대 르 장드르 신부에 이어 2대 멜리장(Melizan, 梅履霜) 신부가 1905년 재령(載寧)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이때부터 1914년까지 8년간 신부 배정이 안 되어 다시 장연본당 관할의 공소로 격하되어 있었다. 1914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3대 주임 사제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부활하면서 교세가 크게 신장 되었다.

1920년 6월 본당 신부가 교체되어 4대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베드로 신부가 부임, 1923년에 전임, 5대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신부와 교우들의 성금으로 성모(聖母)유치원이 개원되었다. 그 후 6대 이순성(李順城, 안드레아, 1928~1934년), 7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1934~1935년) 신부가 재임한 후 8대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윤 신부는 은율 제일의 갑부요 한학자인 홍성숙(洪性肅, 베드로)을 영세 입교시켰으며, 1936년 윤성숙이 사망하자 그 아들 홍세뢰(洪世雷, 필립보)는 선친의 유언대로 교회사업에 많은 재산을 희사하였다. 윤 신부는 사목활동 외에 그 당시 최초의 군난소설(窘難小說)인 ≪은화≫(隱花)를 집필, 기해(己亥)박해 100주년 되던 1939년 1월부터 그가 납치되던 1950년 6월까지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연재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1939년경의 본당 총교세는 1,200여명이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전날에 윤의병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후 많은 본당 교우들은 황해도내의 타군(他郡)의 청년들과 구월산(九月山)을 근거지로 반공 무력투쟁을 벌이다가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 은율 출신으로 6.25 때 순교한 성직자로는 당시 사리원(沙里院)본당의 보좌로 있던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신부가 있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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