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중 [한] 尹亨重

윤형중(1703~1979). 신부. 세례명 마태오. 1903년 4월 29일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대를 이은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6살 때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해 살았다. 1918년 예수성심학교에 입학, 1930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서울 중림동(中林洞)본당의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사 사장에 임명되었고 그 뒤 경향잡지, 경향신문 사장들을 역임하면서 언론창달과 저술활동을 통한 교리 전파에 전생애를 바쳐 가톨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에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1959년 미리내본당 신부, 1961년 복자 수녀회 지도신부 등을 거치면서 그간 순교한 복자현양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지성인들을 위한 교리 강좌를 열어 수많은 사회인사를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병인 폐암(肺癌)과 투병생활을 하다가 1979년 6월 15일 75세를 일기로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하기에 앞서 성모병원 안은행(眼銀行)에 사후 안구(眼球)를 기증키로 한 첫 번째 등록자가 되어, 숨을 거둔 그 이튿날 유언대로 그의 안구는 실명자(失明者)에게 이식되어 광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었다. 자서전(自敍傳)과 ≪나의 교우록(交友錄)≫, 그밖에 수많은 논문과 수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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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혁 [한] 尹昌赫

윤창혁(1862~1895). 평신도. 세례명은 비오. 평남 중화(中和) 출생. 1865년 베르뇌(Bernea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병인(丙寅)박해 후 1871년 만주의 차쿠(岔溝)로 피신. 그곳에서 10여년을 살다가 1881년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리들을 감화, 입교시켰다. 그 뒤 1886년부터 전교에 투신, 박해로 흩어졌던 평안도 지방의 교우들을 모으는데 전력하다가 1895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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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헌 [한] 尹持憲

윤지헌(1764~1801). 순교자. 세례명 프란치스코.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군 진산면) 출신. 정약종(丁若鍾)의 외사촌(外四寸). 1789년 그의 형 윤지충(尹持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 했고, 1791년 12월 8일 그의 형이 순교하자, 곧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으로 피해 살았는데, 1795년 이존창(李存昌)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더욱 믿음이 강해진 그는 교회발전을 위하여 전력을 다했는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4월 26일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다가 서울 의금부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주로 다시 이송된 그는 9월 17일 참수되어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흑산도(黑山島)로 아들은 해남(海南)으로 딸은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각각 유배되어 온 가족이 이산(離散)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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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일기 [한] 尹持忠日記

윤지충(尹持忠)의 옥중 수기(獄中手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체포되어 순교한 윤지충이 자신의 천주교 봉행과 체포후의 신문과정, 옥중생활 등을 기록한 한문(漢文) 수기로 윤지충의 순교 후 교우들에 의해 번역 필사되어 널리 읽혔다. 이 수기는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관변 측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의 교우들로부터 압수한 서적목록 가운데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라는 서명(書名)으로 들어 있으나 현재까지 한문본, 한글본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고, 다만 달레(Dallet) 저술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784)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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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한] 尹持忠

윤지충(1759~1791). 세례명 바오로,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출신. 정약종(丁若鍾)의 외사촌(外四寸). 1784년 겨울 김범우(金範禹)에게서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빌어보고 이를 연구하였고, 3년 후에 정약종 형제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 나가던 중 1791년 모친상을 당하고도 그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 이런 사실은 곧 유림(儒林)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 되었고 끝내는 관가에 고발되어 한때 피신하였으나 그의 삼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관아에 출두하여 수감되었다. 진산군수는 여러 가지 말로 그를 위협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그는 교리의 타당함을 오히려 역설하였으며 그의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였다. 이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도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그는 끝내 천주를 배반할 수 없음을 강조하여 굽히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불효불충 악덕죄로 참수하되 5일간 현수(懸首)하고 사학 천주교를 철저히 엄계(嚴戒)하라는 훈령이 내려, 윤지충은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참형되었다. 그의 나이 33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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