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 [한] 倫理神學 [라] theologia moralis [영] moral theology

1. 윤리신학은 윤리적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톨릭 교회와 서구 및 라틴 계통에서는 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고 부르고, 북구와 영미 계통에서는 그리스도교 윤리학(Christian ethics)이라고 부른다. 윤리문제를 신학적으로 연구한다는 말은 연구의 기본이나 과정을 계시진리(啓示眞理)의 의거해서 알아본다는 의미다. 즉 인간의 윤리성은 인간의 자율(自律)도 타율(他律)도 아닌 하느님과의 응답적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르심과 응답, 소명과 책임이란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의 대상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위만이 아니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으며, 바로 살기 위하여 어떤 가치질서와 의미를 주셨는지 알아보고, 계시된 이 진리들이 시대와 문화여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살아 왔으며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와 성서를 충실히 보관하고 전담하며 해석해주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초로 해야 하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윤리신학은 성서학과 교의신학(敎義神學), 교회법과 수덕학(修德學) 및 윤리학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또 공동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2. 약사 : 하느님의 계시는 여러 세대를 통해 여러 가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났으므로 계시 진리를 기초로 하는 윤리신학은 위와 같은 전제조건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계시에 핵심을 알아내어 시대적 상황과 조건이 무엇이며 제시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바로 윤리신학의 과제이며, 역사 안에서 시도한 내용들이다.

① 교부(敎父)시대 : 교부시대에는 윤리신학도 다른 신학의 분야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신학의 분야가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선포와 함께 일반생활에 관한 훈계와 권유, 시대적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과 죄악들에 대한 단죄, 죄인들에 대한 견책 등 교회 목자들에 의한 교육의 범위에서 논의되었다.

② 중세기 : 서구사회가 그리스도교화됨에 따라 사회윤리는 그리스도교 윤리가 되어야했으며 학문의 세계에서도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 집대성되고, 분류되어 사본을 만들고 전파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13세기부터는 학문이 황금기를 맞아 체계화되고 전문분야가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神學大典) 제2권에서 오늘의 윤리신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을 구분하여 논하였다.

③ 근세 : 신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처음으로 윤리신학이란 용어도 사용되었고(17세기초부터) 신학의 한 독립과목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나, 곧 결의론(決疑論)에 치우쳐 사목자들의 성사집행을 위한 보조학문같이 협소하고 율법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신학의 구분이 다르게 나타났으며 가톨릭의 윤리신학 문제들이 조직신학(組織神學)과 실천신학(實踐神學)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④ 현대 : 산업화사회로 바뀌면서 새로운 윤리문제가 대두되는 19세기 말에서부터 윤리신학도 차차 변화가 요청되었으나, 실제로는 20세기 중반기부터 변화되었다고 보아야한다. 독일계통에서 성서와 교의신학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근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복음에 기초를 둔 윤리생활이 강조되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즉 결의론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그 학술적 해설에 성서의 가르침을 보다 풍부히 가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받은 성소의 고상함을 깨우쳐주고 세상 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를 밝혀주는”(사제양성 20) 윤리신학이 되게 하라고 강조한다.

3. 구조(構造) : 윤리신학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개할 수 있겠으나 두 가지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첫째 기초 윤리학으로서 원리가 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둘째 각론에 해당되는 특수 윤리신학이다.

① 기초윤리신학(基礎倫理神學) : 윤리적 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기초 및 전제조건에 해당되는 원리들을 다룬다.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결정짓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보고, 이에 따른 인간의 목적과 목적에 합당한 행위론을 다룬 뒤 윤리성의 원천인 윤리적 가치와 규범들, 이를 알아들을 수 있고 확인하는 능력으로서 양심을 고찰한 후 인간의 죄, 죄에서의 구원 등을 살펴본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인간의 윤리적 능력으로서의 대신덕(對神德 혹 向主德)과 윤리덕(倫理德)을 다루기도 한다.

② 윤리신학 각론(특수윤리신학) :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영역에서 윤리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 양식이 있다. 과거에는 십계명의 순서를 따르면서 계명과 교회법규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도 하고, 혹은 덕행과 악습의 기준에서 사추덕(四樞德)과 칠죄종(七罪宗) 등을 다루기도 하였다. 20세기 중엽부터는 생활분야나 그리스도인의 삶 즉 성사를 중심으로 한 윤리문제들을 다루기도 한다. 첫째 종교적 차원의 윤리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신앙생활에 관한 것,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행위를 살펴보며, 둘째 자연 속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위치, 의무 등 직업과 노동, 과학기술과 산업사회에 대한 책임 등의 윤리문제들을 검토하고, 셋째는 이웃과의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의무를 고찰한다. 넷째는 사회윤리를 인간과 성 · 가정 · 사회 · 국가 및 세계에 관련된 윤리문제들을 복음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야를 그 누구도 바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회의 발달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므로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한 생활규범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이며 복음정신에 의지하면서 믿음과 바램과 사랑 안에서 완성시켜 나아갈 것이 윤리의 과제로 제시된다.

③ 윤리학과 윤리신학 : 현대에 와서 제기된 문제 중의 하나는 고유한 그리스도교 윤리가 존재하느냐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나 교회사에서 볼 때 구체적 윤리규범들이나 도덕률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에서 발견된 가치들이고 특유하고 전혀 새로운 규범들은 없다고 하는 견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형성되는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이란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특수성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큰 토론이 있었으나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전제한다면 상충되는 의견은 아니다.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살지 않고 지성의 힘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살기 때문에 자연적 차원에서 참됨을 발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구원자이신 하느님이 다른 분이 아니다. 창조의 신비 안에서 들어 있는 인간 능력이 구원의 차원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일반적 윤리규범과 가치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원리 안에서 보완되고 자극되며 바른 방향으로 수정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의미와 과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은 계시진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역사성과 한계성을 분별해 내고 자연도덕과 윤리안에 들어있는 창조주의 질서와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윤리신학은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서 방향과 기준을 얻고 실제 인간생활 안에서 참된 생활가치들을 발견하여 생활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으로 성장하고 꾸준한 개방성으로 성숙해 가야 할 것이다. (崔昌武)

[참고문헌] 유봉준, 기초윤리신학, 1978 / 뵈클레, 기초윤리신학, 서강대 신학연구소 총서 2, 1974 / Handbuch der Christlichen Ethik I-III, 1979~1982 / B. Haring, Frei in Christus I-III, 1979~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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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덕 [한] 倫理德 [라] virtus moralis [영] moral virtue [관련] 덕

인간이 윤리적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능력. 대신덕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케 하는 능력임에 비하여 윤리덕은 인간이 윤리생활을 올바르게 영위하며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 힘이다. 윤리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으로 네 가지(사추덕)를 열거하기도 하고 이 밖에 일곱 가지 죄원(罪源) 즉 칠죄종에 대립되는 일곱 가지 주요덕(主要德)을 열거하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북음삼덕과 종교심 그리고 겸손, 관용, 인내 등을 특출한 윤리덕으로 들기도 한다. (⇒)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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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희 [한] 尹恭熙

윤공희(1924∼). 대주교, 초대 수원(水原) 교구장. 제7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세례명 빅토리노. 평남 진남포시 용정리(龍井里)에서 출생. 1942년 함남 덕원(德源)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고등과, 철학과를 차례로 졸업하고 신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1949년 4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 신학교가 폐쇄되자 지학순 주교(당시 신학생)와 함께 월남하여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大學]에 편입, 1950년 동(同)대학을 졸업하고 3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재직하다가 이듬해 군종신부로 입대,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사목하였고, 1952년 부산 가톨릭도서관 부관장, 1954년 성신중 ·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6년 로마 성 우르바노 대학에 유학, 이듬해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성 그레고리오 대학원에 진학하여 1960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해 5월 로마에서 귀국한 뒤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로 재직하면서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주교 수행원으로 참석하였다.

1963년 수원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20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고, 그 뒤 1967년 노기남 대주교가 서울 대교구장직을 사임하자 1년간 서울 대교구장 서리직을 겸임하였으며 1973년 11월 7일 대주교로 승임됨과 동시에 광주 대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1975년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지내고 여러 차례에 걸쳐 아시아주교회의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현재는 광주 대교구장으로 광주 대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는 이외에 주교회의 부의장과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200주년 주교위원회 등의 위원장 및 성직주교위원회 위원, 그리고 정의평화위원회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2000년 11월 30일 광주대교구 제7대 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에 이어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가 제8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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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 [한] 肉化 [관련] 강생

강생(降生)을 뜻하는 말.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자이므로,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신 하느님의 아들 성자께서 영혼뿐 아니라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다 하여 육화라고 일컫는다. (⇒) 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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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사변 [한] ~事變 [영] Korean War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남침에 의해 발생된 전쟁으로 한국 교회에 큰 피해를 끼쳐 준 사건.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국내여건의 변동에 따라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한국을 38도선을 경계로 남 · 북으로 양분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의 명목으로 진주하고,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북한에는 김일성을 중심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군사부의 세력을 등에 업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를 갖추어 그들의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 혁명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반면에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아직 정돈되어 있지 않고,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좌 · 우익의 갈등이 격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외교정책도 일관성이 없어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동요가 보이자 이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북한 공산집단은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남한은 북한의 침략에 대한 하등의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걸친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 가톨릭 교회가 겪은 피해는 더욱 컸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에 가톨릭 신자들은 곳곳에서 박해와 수난을 당하여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사실상 부인하며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공산정권은 6월 24일 남침 하루 전날 야음을 기하여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대거 체포 구금하게 되었으니, 평양교구의 조인국(趙仁國) 신부, 이경호(李京鎬) 신부, 강영걸(康永杰) 신부, 김교명(金敎明) 신부, 김동철(金東哲) 신부 등 다섯 신부를 비롯하여 함흥, 덕원교구의 김봉식(金鳳植) 신부, 이재철(李載哲) 신부, 황해도 은율본당의 윤의병(尹義炳) 신부, 장연본당의 신윤철(申允鐵) 신부, 겸이포본당의 유재옥(劉載玉) 신부 등이 잡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정권은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거의 대부분 체포 감금한 후 남한에 있던 신부들을 죽이거나 구금하기 시작하였다. 즉 6월 27일에는 강원도 소양본당에서 아일랜드인 콜리어(Collier) 신부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7월 2일에는 서울 영등포본당의 이현종(李顯鍾) 신부를 총살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성직자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고 성당을 징발하였다. 또한 7월 2일부터는 춘천교구에서 캐나반(Canavan, 孫) 신부를 비롯하여 퀸란(Quinlan, 具) 교구장, 홍천본당 크로스비(Crosbie, 趙) 신부가 체포되었고, 강원도 묵호본당의 레일러(Reiller) 신부와 삼척의 마긴(Maginn) 신부는 7월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7월 11일을 전후해서 서울 주재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를 비롯하여 사절비서 부드(Booth, 夫) 신부, 인천 바오로 수녀원에 공베르(A. Gombert, 孔) 신부가 각각 체포되었고, 8월부터는 목포에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신부를 비롯하여 2명의 아일랜드인 신부가 잡히고, 또 대전교구에서는 프랑스인 신부 9명과 한국인 신부 1명이 체포당하였다. 또한 부여의 몰리마르(Molimard, 牟) 신부는 8월 20일에 체포되었다.

한편 북한지역인 황해도에 이때까지 남아 있었던 몇몇 신부들도 6.25 이후 이순성(李順成) 신부, 양덕환(梁德煥) 신부, 이여구(李汝球) 신부, 서기창(徐起昌) 신부, 김경문(金景文) 신부, 전덕표(全德杓) 신부 등이 체포됨으로써, 남북한을 통해 북한군에게 체포 혹은 학살당한 신부, 수녀, 신학생의 수는 15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 이를 교구 · 신분 · 국가별로 보면 위의 표(表1, 2)와 같다.

북한 공산군에게 잡힌 외국인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서울 소공동에 있는 삼화빌딩에 수용되어 문초를 받다가 7월 19일부터는 평양으로 끌려가서 다시 신문을 받은 후, 평양시 밖에 있던 유치원에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그 곳에서 서울로부터 연행되어 온 프랑스 영사와 영국영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 100명을 헤아리는 외국인 성직자들은 다시 9월 6일에 만포진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만포진으로 끌려간 성직자들 가운데 굶주림과 추위로 죽거나 학살당한 이가 11명이 나오게 되었다. 서울 바오로 수녀원의 원장이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1950년 11월 3일 죽음의 행진 길에서 총살당하고, 같은 수녀원의 비에모(Paul Villemot, 禹) 지도신부는 11월 11일에 81세 옥사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던 갈멜 수녀원의 공베르 지도신부는 다음날에 76세로 옥사하였다. 공 신부의 동생으로서 인천 바오로 수녀원의 공베르(Julien Gombert, 孔) 지도신부는 그 다음날에 74세를 일기로 옥사하고, 교황사절 방 주교는 11월 25일에 옥사하였다. 이 밖에 프랑스 신부 2명, 독일 신부 1명, 아일랜드인 신부 1명, 벨기에 수녀 2명이 1951년을 전후하여 옥사하였다.

6.25전쟁은 3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상태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 휴전협정은 평화조약이 아닌 만큼 휴전협정 이후에도 종국적인 평화가 회복되지 못한 채 남 · 북한의 대치상태는 그대로 계속되었고, 열전상태에서 냉전상태로 전환되었을 뿐이었다. 6.25전쟁은 한국군 외에 유엔에 가입된 16개국이 직접 전쟁에 참전하고, 24개국이 물자 원조를 하여 3년간에 걸쳐 싸운 전쟁이었으며, 세계 전쟁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군과 유엔군은 90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176만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러한 인명손실 이외에도 도시와 교량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폐허화하였다. 전쟁의 참화를 입은 이후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고 전화의 극복을 위한 교회의 활동에 감명받은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1953년도 남한의 총인구는 2,144만명이었고, 그 중 16만 6,471명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그 후 8년 동안에 신도들이 해마다 늘어, 1954년도에는 18만 9,000여명, 1955년도에는 21만 5,000여명, 1956년도에는 24만 2,000여명, 1957년도에는 28만 5,000여명, 1958년도에는 35만 4,0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공산군의 학살행위로 말미암아 근 50명의 한국인 신부를 잃게 된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제주도 또는 부산의 영도로 옮기면서 성직자의 양성에 노력한 결과 1950년 10월 20일부터 1953년 8월 22일까지 이르는 사이에도 53명의 새 사제를 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군에게 연행되었던 외국인 성직자들도 휴전협정이 조인된 때를 전후하여 석방되어 각각 본국에 송환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즉 1953년 4월에는 성신대학(가톨릭대학)의 교수였던 코요스(Coyos, 具) 신부 등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나왔고, 그해 8월 24일에는 연길교구의 성 올리베타노 수녀원의 원장이던 페슬러 수녀가 스위스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춘천 교구장이던 퀸란 주교도 에이레로 송환되었다가 그해 10월 5일에 한국주재 교황사절대리로 임명되어 다음해 4월 23일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덕원 교구의 히머(C. Hiemer, 林) 신부를 비롯한 12명의 신부와 12명의 수사와 18명의 수녀는 5년간에 걸친 감금생활을 하는 사이에 17명의 동료를 북한 땅에 묻고 1954년 1월 22일에 서독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편 본국으로 돌아갔던 독일 성직자들도 1953년 7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북도 왜관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인근 6개 군에서 전교하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비테를리(Timotheus Bitterli, 李) 신부가 덕원 · 함흥 · 연길 교구장으로 임명되게 되었다.

전쟁 중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에서는 많은 구호물자를 보내 전재민을 구호해 주었고, 이러한 외국기관의 원조와 한국인 신도들의 노력으로 파괴된 여러 곳의 성당이 재건되었으며, 많은 성당을 새로 세우게 되었다. 또한 전재민을 위한 구호사업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교구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미국 메리놀회에서는 부산에 자선병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하여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1954년 10월 25일 보건부장관은 6.25전쟁 이래 43만명의 부상자를 고쳐 준 메리놀 자선병원장 머쉬 수녀에게 감사장을 주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한국민족 전체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이 전쟁기간 중 교회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전화(戰禍)의 극복과 전재민의 구호를 위해 모든 힘을 다 하였다. 그 결과 6.25전쟁은 한국민에게 천주교의 존재와 그 봉사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휴전회담 이후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柳洪烈著, 增補한국천주교회사, 하권, 가톨릭출판사, 1975 / 金昌文 · 鄭宰善 共編, 韓國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코리아社,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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