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한록 [한] 龍湖閑錄

1801년(순조 1년)부터 1884년(고종 21년)까지의 야사(野史). 저자(著者)는 불명으로, 전 23책에 국내 정치문제와 대외문제가 일기체로 기록되어 있다. 제1 · 2책에서는 1801년부터 1848년(헌종 14년)까지의 사건들이, 제3책부터 제23책까지는 1849년(헌종 15년)부터 1884년까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1801년의 신유(辛酉)박해사건, 진주민란, 병자수호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한국 근대사와 관련된 많은 중요한 사건과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천주교회사(天主敎會史)와 관계있는 기록들이 산재해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청(淸)에 보낸 진주문(陳奏文), 송환기(宋煥箕)의 상소문, 사학유생(四學儒生)의 상소문, 유원화(柳元和)의 상소문 등은 정부 측의 공식기록에서 삭제된 부분까지도 충실히 기록되어 있고 또 1847년 라피에르(Lapierre)가 조선에 왔을 때 이를 조사한 역관의 보고문 ‘대불란서국문정기’(大佛蘭西國問情記)와 천주교와 관련된 평안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 강화군수(江華郡守)의 장계 등 지방관의 보고문도 싣고 있다. 이러한 일부 기록들은 1850년에 프랑스로 보내져 달레의 ≪조선교회사≫ 저술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현재 부족한 교회사 연구자료를 보충해 주는 훌륭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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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하시본당 [한] 龍井下市本堂 [관련] 용정상시본당

1932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용정하시(間島省 延吉縣 龍井下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그리스도왕. 1925년 용정의 신시가지인 하시(下市)에 용정상시(龍井上市)본당의 해성(海星)학교가 이전되어 옴으로써 이 지역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32년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베네딕토회의 시래플(Schrafl, 周)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 수녀원, 사제관, 학교교사 등을 신축했고, 1933년 올리베타노 베네딕토수녀회 분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동회의 수녀들이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1936년 본당 내에 ‘용정가톨릭 전도단’이 창설되어 용정과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활발한 전교활동을 벌이는 한편 해성학교를 6년제의 정식학교로 발전시키고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 용정상시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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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상시본당 [한] 龍井上市本堂

1909년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소재지는 만주 간도성 연길현 용정상시(間島省 延吉縣 龍井上市). 용정지역은 ‘북관(北關)의 12사도(使徒)’로 불리는 최문화(崔文化, 베네딕토), 최병학(崔秉學) 등이 1900년 20여 가구의 교우가족을 데리고 용정의 대교동(大敎洞, 일명 佛洞)에 정착, 교우촌을 형성함으로써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곳이다. 교우촌 형성 이후 주민이 늘어나 1906년 삼애학교(三愛學校)가 설립되면서 차츰 교세가 신장되어 1909년 삼원봉(三元洞)본당과 함께 간도(間島)의 첫본당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신부가 부임, 성당과 사제관을 짓는 한편 10개 지역에 공소를 개설했고, 1911년 용정시가의 화재로 성당이 전소하자 1912년 벽돌 양옥성당을 신축,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방문시 축성식을 가졌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본당회장 김영학(金永學)을 중심으로 교우들이 중심이 되어 용정과 인근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이듬해 5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동생 안정근(安定根)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함경도와 간도지방이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의 포교지로 되자 이듬해 베네딕토회의 히머(Hiemer, 任)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 해성학교(海星學校)를 설립했고, 이어 하프너(Hafner, 韓) 신부가 1925년에서 1931년까지, 랍(Rapp, 朴) 신부가 1931년에서 1932년까지 사목하였다. 1932년 아펠만(Appelmann, 裵)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 탈시시오소년회를 조직하여 이를 교구차원의 소년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아울러 신심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용정에 새로운 용정하시(龍井下市)본당이 창설되자 용정상시본당은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38년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1943년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아노)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내 신심단체로는 탈시시오소년회를 포함한 7개의 단체가 있었고, 이외에 사업체로 해성학교, 야학 등이 있었다. 1936년의 교세는 교우수 1,743명, 공소 8개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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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본당 [한] 龍召幕本堂

소재지는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江原道 原城郡 神林面 龍岩里) 719의 2. 본당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용소막본당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豊水院), 원주에 이어 세번째로 1904년에 설정된 교회이다. 이 교회의 개척자는 제천(堤川) 사람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1848년에 태어나 18세 때 병인(丙寅) 박해를 겪고, 1893년 풍수원본당의 르메르(L. Le Merre, 李類斯)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에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다가 1898년 용소막에 정착, 5∼6명 교우들과 작은 경당을 짓고 원주본당 소속 공소를 개설하였다. 1904년 4월 용소막공소는 원주본당에서 분리, 초대 주임 프와오(Vedastus Poyaud, 表光東) 신부가 부임, 용소막본당으로 발족하였다.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 · 평창 · 영월 · 제천 · 단양 등 5개 군에 공소는 17개로, 본당을 중심으로 사방 300리의 광활한 지역이었으며, 신자수는 864명이었다. 그러나 10여간 초가성당을 짓고 선교를 시작한 프와오 신부가 최도철,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회장 등의 도움에 힘입어 수년 후에는 교세가 1,000명을 넘었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 될 때는 교세 2,000명의 큰 본당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10년 4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기요(J. Guillot, 吉) 신부는 새 양옥성당 건립을 계획, 신축공사를 시작하려던 차에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 반발로 8월에 본국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귀국, 애석하게도 1916년 5월에 전사하고 말았다. 기요 신부의 성당 신축계획을 실천에 옮긴 선교사는 3대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주임신부였다. 그는 1914년 가을에 묘재공소 이사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 1915년 가을에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성당을 준공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1927년 5월 서울의 백동(栢洞, 현 혜화동)본당 창설신부로 전임, 안성(安城)본당에 있던 뤼카(F. Lucas, 陸嘉恩) 신부가 4대 주임으로 있은 뒤, 1928년에는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가 5대 주임으로 사목, 1940년 7월 제천공소를 본당으로 분리 승격시켰다. 같은 해 12월 춘천교구 설정으로 용소막본당은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관, 골롬바노회 선교사들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6.25동란 때는 성당이 공산군의 식량창고가 되어 많은 파손을 보았다. 수복 후에 이종흥(李鍾興, 크리산도) 신부가 11대 주임으로 부임, 성당과 사제관을 원상복구하고 강당을 신축하였다. 1954년 대구(大邱)교구로 이적한 이 신부의 후임으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 증축사업을 계속하면서 성가대를 도시수준으로 육성 발전시켰다. 그 후부터 골룸바노회 신부들이 주임으로 계속 부임했으며, 1965년에 이 본당은 춘천교구와 청주(淸州)교구에서 분할 신설된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다. 그 동안 관할지역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진출 현상으로 교세가 크게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주임은 김태원(요한) 신부이고, 신자수는 744명(1984년 현재), 공소는 3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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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본당 [한] 龍山本堂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1920년경에 약현(藥峴)본당[현 중림동본당]의 공소로 출발, 1941년 용산본당으로 승격, 1942년 초대 본당 사제로 서울 교구 제 9대 교구장을 지낸 프랑스인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부임하였다. 1946년에는 신축된 본당건물로 이전, 1948년에 부임한 2대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는 1952년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1954년에 부임한 5대 조창희(趙昌熙, 베네딕토) 신부는 공사중이던 현 성당을 그 해 12월에 준공시켰고, 1955년 구사제관을 신축, 1960년에는 현 강당을 신축하였다. 1963년 샤르트르 성바오로회 소속의 전교수녀를 상주케 했고, 1965년에는 청파동본당을 분리 독립시켰다. 1969년 공덕동(孔德洞)본당을, 1971년에는 신수동(新水洞)본당을 각각 분리 독립시켰다. 1974년에는 7대 남영희(南永熙, 이시도로) 신부가 구사제관을 헐고 그 자리에 현 사제관을, 1977년에는 주일학교 교리교실을 각각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의 관할구역은 산천동, 도원동, 용문동, 신창동, 원효로 2, 3, 4가, 청암동, 마포동, 도화 1, 2동 등 11개동에 걸친다. 현 본당주임은 김병일(金秉溢, 요셉) 신부, 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신자수는 3,088명(1983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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