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한] 陽明學

중국 명(明)나라 때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이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여 주창한 ‘양지’(良知)를 기본입장으로 하는 실천철학이다. 마음밖에 사리(事理)가 따로 없으며, 사람마다 양지를 타고났지만, 물욕(物慾)이 있는 탓으로 말미암아 ‘성인’과 ‘범인’의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인에 있어서는 사욕(私慾)에 싸여서 양지가 흐려지는 것이니, 이런 장해를 없애도록 노력하고, 지행(知行)의 합일을 꾀해야만 된다는 학설이다. 미리 정해져 있는 이법(理法)에 따르기보다는, 마음의 양지에 바탕을 둔 시비판별의 능력에 절대적인 신뢰를 하여 그 본심대로 행동함을 존중하기 때문에 ‘심학’(心學)라고도 하며, 일명 ‘王學’ 또는 왕양명이 절강성 여요(浙江省 餘姚)에서 태어났으므로 ‘요강학’(姚江學)이라고도 한다.

주자(朱子)는 ‘이’(理)를 중요시하고, 객관적으로 봉건질서를 합리화하였으나, 명나라 중기부터 서민층의 대두와 농민반란 등이 있었는데, 이미 껍데기만 남은 주자학은 이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왕양명은, ‘이’는 선천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心卽理], 따라서 ‘지’(知)는 ‘행’(行) 곧 실천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주자에서처럼 외물(外物)에 이치를 캐들어 가서[窮理] 지식을 넓히는 것[致知]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생겨난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格]이며 양지[知]를 충분히 발휘하도록[致] 하는 것[致良知]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양명학’은 현실의 유교윤리 그 자체에 비판을 가한 것은 아니나, ‘이’의 주관화, 상대화는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그 자체를 중시하여, 서서히 개인의 존엄을 자각시켜 과거의 인습적인 윤리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하였다.

왕양명의 뒤를 이은 문인(門人) 사이에 양지의 규범적인 성격을 따지는 논쟁이 격화되어 전통 유교에 적대하는 왕용계(王龍溪, 1498~1528), 이탁오(李卓吾, 1527~1602) 등을 지도자로 하는 좌파(左派), 주자학파에 파문을 일으키게 하여 수정(修正) 주자학을 탄생시킨 중도파(中道派)와 우파(右派)가 갈라져 나왔다. 한국의 경우, 양명학(陽明學)을 신봉하는 학파 즉 양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 유명한 사람은 조선조 영조(英祖) 때의 정제두(鄭齊斗, 1649~1736)로서, 그는 양명학에 대한 이황(李湟)의 반박 이후 힘을 펴지 못해 오던 이 학설을 한국에 심는데 일생을 바쳐 연구하였고, 그의 뒤를 이광사(李匡師), 이태형(李泰亨), 이광려(李匡呂) 등이 계승하였다. 특히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배웠으나 당시 학계에서 이단시하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끝내 한국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음은 높이 평가받을 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霞谷集(鄭齊斗文集) / 韓國史大辭典, 敎育出版公社, 1977, 新改正增補版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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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마락 [한] 陽瑪諾 [관련] 디아스

⇒ 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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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재 [한] 梁棟材 [관련] 그라몽

이승훈의 영세신부인 그라몽의 중국명. ⇒ 그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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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동본당 [한] 陽德洞本堂

마산교구 주교좌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소재지는 경남 마산시 양덕동 72의 7. 1975년 12월 8일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박기홍(朴基鴻,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78년 11월 25일 완공하였고, 1979년 2월 7일 마산교구 주교좌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주보가 성가정에서 예수성심으로 바뀌었으며, 이어 5월 31일 2대 주임으로 김두호 신부(金斗湖, 알로이시오)가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예수성심 전교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어 동회(同會)의 수녀들이 전교와 본당사목을 돕고 있으며, 1984년 현재의 교세는 신자수 3,41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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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섭 [한] 梁基涉

양기섭(1905∼1982). 신부. 세례명 베드로. 평남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薪枝里)에서 숙천섭가지본당 초대 주임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의 복사를 지낸 양덕현(梁德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10월 26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졸업과 함께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평양 관후리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1934년 신리(新里)본당 주임신부, 1939년 숙천(肅川)본당 주임신부, 1942년 진남포(鎭南浦)본당의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교구로 이적한 뒤 초대 경향신문 사장으로 1년간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10년 동안 한국 교회를 위해 활약했고, 1957년 12월 귀국, 성신대학 의학부(가톨릭대학 의학부의 前身) 부장 겸 성모병원장에 취임하고 이어 1958년 서울교구 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60년 명동본당 주임신부, 1962년 일산본당 주임신부, 1965년 가평본당 주임신부, 1967년 신당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973년 일선사목에서 은퇴하고 원주교구의 교회유적지 배론[舟論]에 들어가 배론성역화사업을 주도, 10여년간 개발에 헌신하여 황무지였던 배론의 면모를 일신시켜 놓았다. 그러나 1982년 4월 3일 자신이 배론에 새운 건축물의 축성식을 11일 남기고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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