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한] 審判 [라] judicium [영] judgement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그 초대에 응한 정도에 따라 죽은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응보를 받는 일.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된다”(히브 10:27).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인은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사도신경) 라고 고백한다.

심판은 하느님과 인간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세 번째의 계기를 이룬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자유와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하느님의 초대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사랑과 기쁨 속에서 인간 서로 간에 일치하고 인간들과 하느님이 더불어 하나가 되어 당신의 선(善)과 행복에 참여하도록 부르셨으며 이 부르심을 통하여 창조 목적을 구현하고자 하셨다. 두 번째 계기는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 그 응답은 하느님의 목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성실히 협력하는 생활로 나타나거나, 그 목적을 외면하여 하느님과 당신의 의도로부터 멀어지는 생활로 표현된다. 세 번째의 계기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대하여 하느님이 창조목적에 비추어 판단을 내리는 순서이다.

그 판단은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하느님의 초대에 대하여 이를 거절함으로써 유죄(有罪)한 응답을 한 자는 지옥으로 보내어 멸망시키고, 그 초대를 불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한 자는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생활한 자는 천국으로 보내어 그의 응답 행위를 완성시킨다. 이러한 세 가지 판단을 사람이 죽은 직후에 개인적으로 받는 것을 ‘사심판’이라 하고, 세상 종말에 공적으로 받는 형태를 ‘공심판’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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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기 [한] 沈阿只

沈阿只(?~1801). 순교자.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바르바라.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던 중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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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술 [한] 心靈術 [영] parapsychology

심령현상(paraphenomena)을 연구하는 과학으로 심령과학이라고도 한다. 심령현상이란 현대의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정신현상,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생각이 서로 전달되는 정신 감응(精神感應, telephathy),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각하는 천리안(千里眼, clairvoyance), 예언(豫言, premonition) 등과 같은 ‘감각의 지각’(ESP = extra sensory perception)과 정신적인 힘으로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염력(念力, PK = psychokinesis) 등을 총칭하여 지칭하는 용어다. 이러한 심령현상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주물숭배(呪物崇拜, fetishism), 마술, 점성술 등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심령술이 교회 내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운동 이후의 일이다. 즉 십자군운동으로 인하여 중동지방에서 발흥하던 마술, 신비철학, 점성술, 악마추방을 위한 형벌 등이 서구사회에 유입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심령술을 악마에게 공헌하는 행위라 규정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심령술을 배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은 민간에서 미신이나 관습의 형태로 계승되어 19세기에는 메스머리즘(mesmerism, 최면술) 등을 발생케 하였고, 19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심령술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1882년 영국에서 ‘심령연구협회’(The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가 창립되었고, 이어 미국과 기타 여러 나라에서도 유사한 단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의 심령술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례의 수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서야 조직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심령술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화란교리서≫(Die Nienwe Katechismus)에서 간단히 제시된다. 이 책은 ‘감각외적 지각’을 좀 더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① 심령술이 악용되는 경우, ② 심령술을 장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 경우, ③ 인생의 궁극적인 신비를 심령술로 해결하려는 경우에 대해서는 잘못된 접근법임을 예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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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 [한] 沈瓊

沈瓊(?~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경주진영에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의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옥사(獄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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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한] 實學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전통적 유학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한 범유학적(汎儒學的) 개혁사상. 조선조는 16세기 후반기부터 정치적인 대립과 분열이 심화되고, 유교의 학풍이란 사장(詞章) 중심이요, 당쟁(黨爭)을 조장하는 경향으로 흘러 사회체제를 개편하거나 혁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임란(壬亂)의 피해로 인하여 사회체제의 붕괴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리고 파탄에 직면한 사회 경제의 제반문제를 바로잡는 대안을 기존의 성리학에서는 제시해 주지 못했다. 이에 뜻있는 관료나 학자들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사장적(詞章的) 학풍이나 사변적(思辨的)인 성리학을 배격하고 급박한 현실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규범을 지양할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새로운 인식태도를 찾게 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서양의 학술에 관한 견문이 차츰 넓혀짐에 따라 더욱 열기를 더하게 됐다. 그래서 17-18세기에는 일부 관료 사이에도 그런 기풍이 작용, 김육(金堉)과 이원익(李元翼) 등은 대동법(大同法)이며 균역법(均役法)과 같이 민중을 중시하는 경제체제 개편에 힘썼다. 이처럼 기존체제의 강화 내지 보강을 기도하던 이들을 초기실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18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실학사상은 한결 고조되고 학자들은 자기의 나라, 조선 자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사회상태의 변화와 의식의 확대,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으로 자아에 대한 반성과 자아의식이 싹튼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조선조의 역사 · 지리 · 국어 등을 주로 한 여러 분야의 학문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이때 실학사상가들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북돋아 주었으며, 이익(李瀷, 1681~1763)의 역사이론에 바탕을 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로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어 종래의 중국 중심의 사관(史觀)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전통성과 독자성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실학이란 주로 조선조 후기, 즉 영 · 정조(英 · 正祖) 시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을 일컫는다. 따라서 종래 성리학의 공리공론(空理空論)과 같은 폐단을 비판,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올바로 보면서 민중의 입장에서 광범한 학문적 분야를 통하여 민중을 대변하고, 또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경제이론과 기술론, 그리고 위정자의 자세 등을 제시한 새 학풍을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의 실학의 특질은 낡은 봉건적 전근대적 의식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근대의식 내지는 근대지향 의식이었다. 실학은 또 동아시아적 세계주의인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영향을 받게 된 우리나라의 문화풍토를 반성하며, 비민족적(非民族的) 정신상태를 타파하고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민족의 존립과 번영을 기도하는 민족지향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냈다.

현실을 중시하는 실학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하였다. 기존 사회질서를 개편하고 사회발전을 열망하는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접촉은 절실한 염원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 실학 사상가들에게 가톨릭 사상은 그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신념체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가톨릭 사상에 대한 연구는 이들 실학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열망하는 이들 실학자들에 있어서도 가톨릭 사상이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실천적인 인생철학의 성리학적 배경에서 생활해온 이들에게 유일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내세의 구원 등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은 대단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가톨릭 사상과의 문화접촉은 지식계층 사이에서 비교적 광범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에의 귀의라는 문화 수용(受容)은 보다 제한된 범위에서 일어나게 된다.

당시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천주교에 대한 반응은 3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서학의 이질성을 위험스럽게 보는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이다. 그들은 서학의 해독이 맹수보다도 더 크다고 경고한 안정복과 척사 문헌인 ≪서학변(西學辯)≫을 저술한 신후담(愼後聃) 등이 이 유파에 속한다. 둘째는 서학이 갖고 있는 과학이나 기술의 분야는 수용하되 서학의 윤리나 종교적인 분야는 배격하는 경우였다. 그들은 서학이 갖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의 냉엄한 현실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의한 부국유민(富國裕民)의 방도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원하면서도, 서학의 종교성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유설(謬說)로 파악하려던 북학(北學)에 의해 대표된다. 셋째는 서학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른바 서학도(西學徒)들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계(南人系)의 젊은 학자들로서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대표된다.

가톨릭의 본격적인 수용은 이들 남인계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학이 유교주의의 부족한 점을 극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가톨릭의 사상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모두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그들은 1770년대 후반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회를 가지면서 문헌과 자료가 부족함을 깨닫고, 1783년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 북경(北京)에 가게 된 이승훈(李承薰)에게 북경의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적과 성물(聖物)을 구해 오는 한편 꼭 영세를 받고 오도록 권고하였다. 그래서 1784년 이승훈이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의 기점(起點)이 된다.

[참고문헌] 劉元東, 韓國實學槪論, 正音文化社, 198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가톨릭社會科學硏究, 第1輯, 韓國社會科學硏究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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