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밖 네거리 [한] 西小門∼

44인의 성인과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기념지. 남소문(南小門, 현 光熙門)과 함께 서울 도성의 유해를 운반하는 곳으로 지정된 서소문(西小門)이 순교자의 피로 물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년)부터의 일이다. 이 땅의 교회를 이끌어가던 정약종(丁若鍾, 요한), 강완숙(姜完淑, 콜롬바), 최창현(崔昌顯, 요한) 등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로 처형된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되었다. 즉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김아기(金阿只, 아가다), 박아기(朴阿只, 안나), 이아가다(李,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한아기(韓阿只,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이광렬(李光烈, 요한), 김노사(金老沙,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누시아(金累時阿,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후재(朴厚載, 요한),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김유리대(金琉璃代,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토),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등 41명의 성인들이 순교하였고, 병인박해 때에는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등 3명의 성인과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교우들이 처형되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피어린 순교지인 서소문밖 네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다만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아현 고가도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부근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하여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순교자현양탑’을 서소문공원 내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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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봉 [한] 徐碩奉

徐碩奉(?-1815).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경상도 청송(靑松) 노래산(老萊山)에서 1815년 2월 22일,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많은 신자들과 함께 잡혀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어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1815년 10월 18일(음) 옥사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다만 사형언도가 내려졌으나, 집행되기 전에 옥사하였다는 기록밖엔 없다. 그의 아내도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언제 집행되었는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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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한] 徐相燉

徐相燉(?-1913). 대구교구의 초대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그는 조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일찍이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다시 제천에서 경상도 상주(尙州)로 피신하였다가, 그가 10세 때 대구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대구에는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고, 더구나 그의 독실한 신덕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면으로 교인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하여 봄과 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백 석의 식량을 희사하였는데, 그의 이런 자선에 감읍하여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그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처음으로 대구본당을 개척하자,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1911년 조선교구가 둘로 나뉘게 되자, 그는 남조선교구의 주교 소재지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하여 맹렬히 운동하여 뜻을 이루었다. 드망즈 주교가 대구로 부임하자, 그는 대성당 앞의 매씨(妹氏)의 집을 주교의 사택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자기 소유인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사업에 희사하였다. 여기에 대구교구의 중추기관인 주교관 · 신학교 · 수녀원 · 고아원 · 성모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니 대구교구는 반석같은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의 소원이던 성모의 루르드동굴이 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와 관계된 활동 이외에도 1907년 1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창, 각종 신문의 보도를 통해 전국에 확산되고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전개시킨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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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본당 [한] 瑞山本堂

대전교구 관할 구합덕(舊合德)본당 산하의 공소로 출발하여 1908년 폴리(Polly, 沈應榮) 신부에 의해 서산본당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1914년 폴리 신부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입대하여 본국 프랑스로 돌아가자, 이 본당은 구합덕본당(본당신부 라리보)에 합병되었고 1916년 안학만(安學滿)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서산본당으로서 독립, 본당을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로 옮겼다. 1919년 1차 대전의 종전으로 폴리 신부가 서산본당에 복귀, 본당을 음암면 상홍리로 이전, 1921년까지 사목하였다. 1932년 바로(Barraux, 范) 신부 취임, 1937년 현 성당을 신축, 준공시켰고, 1946년 재임 중 사망하였다. 1947년 유치원이 개원되었고, 1950년 6.25 전쟁으로 당시의 콜랭(Collin, 高, 1949년 취임) 본당신부는 공산군에 의해 대전으로 압송 도중에 행방불명되는 비극을 겪었다. 올리비에(Jean Olivier, 吳) 신부 때인 1964년 태안(泰安)본당이 신자 530명과 함께 분리 독립, 1973년 운산(雲山)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현재의 구자오(具滋五, 베네딕토) 신부(1980년 취임)는 1982년 현 사제관과 교육회관을 준공케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 본당의 주보는 수호천사, 신자수는 2,937명(1984년 현재), 산하 공소는 11개소, 경내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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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한] 西士

신부(神父)를 지칭하던 옛말. 원래 중국인(中國人)들이 사용했던 말로 천주교(天主敎)를 서양(西洋)에서 전래된 종교라 하여 서교(西敎)라 부르고 그러한 서양의 종교를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신부들을 서사라고 불렀다. 예컨대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서양교사(敎士)인 서사와 중국의 학자인 중사(中士)와의 대화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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