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한] 西江大學校

예수회에서 설립한 종합대학교. 소재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1948년 한국 가톨릭 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us)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계획되어, 1954년 예수회원인 독일의 테오도로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박사가 서울에서 창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5년 예수회 위스컨신관구에 그 창립사업이 이관됨으로써 비로소 창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1956년에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가 인가를 받아 마포구 신수동에 대지를 구입하고, 1960년에 대학설립 인가를 받음으로써, 동년 4월에 개교를 보게 되었다. 초대 학장으로는 킬로런(Kenneth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고, 영어영문학과 · 사학과 · 철학과 · 수학과 · 물리학과 · 경제학과의 6개 학과를 설치한 단과대학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여 불과 10년 후인 1970년에는 명실상부한 종합대학교로 개편되어 초대 총장에 데일리(John P. Daly) 신부가 취임하였다.

가톨릭 세계관을 기초로 설립된 동 대학교는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고 학문의 전수와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인간형성에 노력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공동체가 됨을 모토로 학술연마와 인격도야에 정진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문과대학 · 이공대학 · 경상대학의 3개 대학과, 대학원 · 경영대학원의 2개 대학원 및 부속기관으로는 과학기술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 경제경영연구소, 산업문제연구소, 신학연구소등 15개 기관을 갖춘 전국 유수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1964년 2월에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한 이래 제18회(1980학년도)까지 총 4,883명의 졸업생이 사회 각계에 진출하여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으나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어, 동 대학의 질적인 면에서의 평가는 점차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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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원] Chantal, Jeanne Francoise

Chantal, Jeanne Francoise(1572-1641). 성녀. 프랑스의 가톨릭 신비주의자. 방문 수도회(여자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축일은 8월 21일에서 12월 12일로 바뀌었다. 디종의 프레미오가(家)에 태어나 1592년 샹탈 남작과 결혼했으나, 1601년 남편이 급사(急死)한 뒤 몽트롱성(城)에서 기도와 자선과 자녀 양육에 전심하였다. 1604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알게 되어 그의 영적 지도를 받고, 1610년 프란치스코의 안(案)에 따라 오트사브와현(縣)의 아느시에서 ‘성모방문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이것은 주로 과부, 과거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에 견디지 못하는 여성을 위한 수도회로, 프란치스카는 수도원장으로서 신비적인 관생생활과 실천적 효과가 많은 활동을 일치시켰다. 1622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사망하자, 그의 설교집 및 그와의 왕복서한집을 간행, 덕행생활에 관한 문서의 공표로 인해 그의 시복(諡福)을 위한 조사에서 제일의 증자(證者)가 되었다. 1751년에 시복, 1767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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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 [원] Schall von Bell, Johannes Adam

Schall von Bell, Johannes Adam(1591-1666). 예수회 소속 중국선교사. 중국명 탕약망(湯若望), 자(字)는 도미(道美). 독일 쾰른(Koln)에서 출생, 여기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608년 로마에 유학, 제르마니쿰(Germanicum)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61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8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622년 중국에 입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3년간 전교했고, 1630년 명(明) 의종(毅宗)의 명으로 ≪숭정역서≫ (崇禎曆書) 편찬에 참여, 1634년 그 완성을 보았다. 1644년 청(淸)에 의해 북경이 함락된 후, 청 순치제(順治帝)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정(欽天監正)이 되었고 이 때 청에 볼모로 잡혀 왔던 조선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어 서구과학에 대한 지식과 천주교 교리를 담론하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에게 천문역산서 · 서학서 · 여지구 등과 천주상을 주어 조선이 최초로 서구문명과 접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646년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을 편찬, 이 공로로 태상사경(太常寺卿)이 되었고 1650년 교리연구 · 학문연구와 전교를 위해 북경에 천주당 남당(南堂)을 지었으며 이듬해 통의대부(通儀大夫)가 되었다. 1664년 오명환(吳明-) · 양광선(陽光先) 등의 모함으로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순치제 어머니의 노력으로 석방되었고 그 후 1666년 북경에서 사망, 북경 부성문(阜城門) 밖 묘지에 안장되었다. 리치와 함께 중국 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進呈書像≫, ≪主制군微≫(緯主, 1629), ≪主敎綠起≫(北京 1643), ≪眞福訓詮≫, ≪渾天義說≫, ≪西洋測日曆≫, ≪學曆小辯≫, ≪民曆補註解惑≫, ≪新曆曉惑≫, ≪奏硫≫, ≪新法曆引≫, ≪曆法西傳≫, ≪西洋新法曆書≫, ≪崇一堂日記隨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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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브리앙 [원] Chateaubriand, Francois Rene Vicomte de

Chateaubriand, Francois Rene Vicomte de(1768-1848). 프랑스의 소설가. 정치가로서도 알려졌고 특히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수(眞髓≫(La genie du Christianisme), ≪아탈라≫(Atala), ≪르네≫(Rene)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문장은 화려하고 상상력에 넘쳐 있으며 웅대한 묘사력과 아울러 낭만주의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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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원] Chastan, Jacques Honore

Chastan, Jacques Honore(1803-1839). 모방(Maubant) 신부에 이어 서양인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입국하여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순교한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같은 해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마카오에 상륙하자 그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수락되었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 · 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楊根)에 가 있던 모방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옷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서울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니,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에야 서울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선교사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서울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한편 그는 회장 한 사람을 부산(釜山)에 내려 보내,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관헌에서는 당쟁의 여파까지 곁들여,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하여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金順成)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Launay, Martyrs Fancais et Coreens 1838-1846, Paris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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