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 [한] 葡萄酒 [라] vinum [영] wine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포도주는 구약 · 신약시대를 거쳐 교회의 중요한 음식물의 하나로 취급된다. 구약시대에는 번제(燔祭)의 희생제물과 함께 하느님께 바쳐졌었고, 과월절 식사에 중요한 식품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치유제(治癒劑)로 사용되기도 했다(1디모 5:23, 루가 10:34). 한편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주를 들고 사례하신 후 포도주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신 후부터 포도주는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의 상징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이 맺는 새롭고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미사 때 포도주를 축성하여 나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교회의 전례규정에 따르면 포도주는 축성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 이 때 축성되는 포도주는 이물질(異物質)이 섞이지 않은 순순한 포도로 빚어 발효, 산화시킨 것으로 소량의 물(포도주와 물의 비율은 2대 1)을 섞은 것이 사용된다. 포도주에 물을 섞는 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물과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를 혼합함으로써 인류와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위로 흐르는 피와 물로도 암시된다.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하는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지 않는다.

한편 포도주를 빚는 포도는 성서에서 비유의 대상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교회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로, 포도덩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비유되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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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부장 [한] 捕盜部將 [관련] 포도청

조선시대 포도청(捕盜廳)의 한 벼슬. 포교(捕校), 또는 포도군관(捕盜軍官)으로도 불렸다. 포도부장은 좌 · 우 포도청에 각각 4명이 있었는데 그 위의 직급으로는 종사관(從事官),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밑의 직급으로는 무료부장(無料部將), 가설부장(加說部將), 포도군사(捕盜軍士) 등이 있었다. 포도부장은 평상시에는 포도대장의 사택(私宅) 근처에 설치되어 있던 사관청(仕官廳)에서 공무를 집행했고, 순찰시에는 통부(通符)[죄인을 체포할 때 제시하는 증명, 오늘날의 영장과 같은 구실을 함]를 차고 포졸들을 거느리고 도성 안팎을 순찰하며 죄인을 체포하였다. (⇒) 포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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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대장 [한] 捕盜大將 [관련] 포도부장 포도청

조선시대 포도청의 으뜸벼슬. 종2품(從二品)의 무관직으로 일명 포장(捕將)으로 불렸다. 좌 · 우 포도청에 각각 1명씩 있었으며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 · 우윤(右尹)을 역임한 자 중에서 임명하였다. 포도대장의 밑에는 종사관(從事官) 3명, 포도부장 4명, 무료부장(無料部將) 26명, 가설부장(加說部將) 12명, 그리고 다수의 포졸들이 있었고, 포도대장의 사택(私宅) 가까이에는 사관청(仕官廳)이 설치되어 있어 포도부장들이 이곳에서 공무를 집행하였다. (⇒) 포도청, 포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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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군사 [한] 浦盜軍士 [관련] 포도청

조선시대 포도청(捕盜廳)의 최하급 군졸로서 일반적으로 포졸(捕卒)로 불렸다. 이들은 붉은 오라를 차고 다니다가 죄인을 잡아 결박하였다. (⇒) 포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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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내본당 [한] 浦內本堂

전(前) 춘천교구 소속으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삼포리에 소재한 침묵의 본당. 1896년 이천 염산본당(簾山本堂, 후에 伊川本堂)에서 분할 설립되어 부이수(Bouyssou, 孫)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당시 관할공소는 이천에 2개, 신계에 5개가 있었으며, 신자수는 300여명이었다. 강원도보다도 황해도 신계지방에 관할공소가 많았던 것은 이 본당의 위치가 황해도에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부이수 신부는 ‘애주(愛主) · 애국(愛國) · 애인(愛人)’을 교지(校旨)로 한 삼애학교(三愛學校, 뒤에 삼애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 이르러 본당 관할지역이 강원도에 인접한 황해도 지방으로 더욱 확대되어 공소수가 신계에 8개, 곡산에 5개, 수안에 5개 등으로 증가하고 신자수도 1,869명으로 늘었다.

그 뒤 1922년에는 관할공소가 이천군에 2개, 신계군에 8개, 수안군에 4개, 곡산군에 1개가 되었다. 1928년에는 신계군 태을리에 새본당(속칭 三次洞本堂, 1935에 丁峰里로 옮겨서 丁峰本堂이 됨)이 분할, 설립됨으로써 신계 · 곡산 · 수안 등 대부분의 관할지역이 분리되어 이천본당 신부가 한때 겸임하였다가 다시 본당으로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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