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명 [한] 報名

초기 한국교회에서 명도회(明道會)와 관련하여 사용한 고유한 용어. 명도회원들은 매월 그 달의 주보성인(主保聖人)이 지정되어 있는 회원권을 배부받았다. 명도회에 가입하는 절차이기도한 이러한 회원권 제도를 당시의 신자들은 보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열심한 신자를 신부에게 알리면 신부가 성인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어 보내고 연말에 가서 신자의 근면 여부와 전교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성인의 이름을 보고한 후 신공(神功)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입회가 허락되고 부지런히 하지 않은 사람은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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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정교조약 [한] ∼政敎條約 [라] concordatum Wormatiense [독] Wormser Konkordat

교황 갈리스도 2세와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가 그간의 서임권투쟁(敍任權鬪爭, Investiturstreit)을 종식시키기 위해 1122년 보름스에서 맺은 조약. 이제까지 황제와 교황은 서로 배타적인 임직권을 갖기 위해 서로 싸웠는데, 이 조약을 통해 양측은 이중임직(二重任職)에 합의함으로써 주교의 선출권이 주교좌 성당의 성직자(13세기의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에게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주교 선출의 자유와 교회의 임직을 보장되는 대신 황제는 주교에게 세속적인 임직을 수여하였다. 즉 봉토(封土)를 수여함으로써 그를 세속적인 영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보름스 조약은 주교에게 2개의 지위, 즉 주교로서의 영적인 지위와 영주로서의 세속적인 지위를 동시에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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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메오 [라] Borromaeus, Carolus

Borromaeus, Carolus(1538-1584). 성인. 주교. 축일은 11월 4일. 전형적인 트리엔트적 사목(司牧) 주교. 밀라노의 대주교. 추기경. 주교직의 쇄신에 앞장선 가톨릭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다. 마조레(Maggiore) 호수 가까이에 있는 아로나(Arona)의 귀족가문출신으로 일찍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었다.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 1559년 외삼촌인 새 교황 비오(Pius) 4세에 의해 발탁되어 1560년 추기경 및 밀라노의 대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62-1563년)의 제3회기 및 마지막 회기에서 교황을 보좌, 공의회 정신을 반영하여 본당신부를 위한 로마 교리문답서 ≪로마 공교요리(∼公敎要理)≫(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를 초안, 감수하였다. 밀라노로 돌아오자 스스로 가톨릭 개혁의 기수로서 교구에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 성직자와 평신도의 도덕 및 예절을 강화시키고 교구 업무의 원활을 기하였다. 또한 예수회(Societas Jesu)를 지원하여 예수회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개혁은 교구 내에서 커다란 반감을 일으켰으나 ≪밀라노 교회문서≫(Acta ecclesiae Mediolanensis, 1582)에 수록되고 그 후 자주 인쇄된 그의 개혁주장은 이탈리아, 독일, 특히 스위스의 주교들이 개혁활동을 추진하는데 있어 표준이 되었다. 1610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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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례 [한] 補禮 [라] caeremonia supplementi

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그 한 예를 든다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죽음이 임박했을 경우나 사제(司祭)가 없을 때 일반 사람들도 성세성사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물로써 이마를 씻으며 기도문을 욈으로써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을 대세 또는 ‘비상세례’(非常洗禮)라고 하여 정식 세례와 똑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에서 비상세례를 받은 자가 죽지 않고 살아났을 경우, 또 사제가 없어서 비상세례를 받았을 경우 신자 생활을 하려면 그 때 갖추지 못한 예식들을 보충하는 ‘보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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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네 [원] Baudounet, Francois Xavier

Baudounet, Francois Xavier(1859-1915).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대구교구 선교사.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고 동료신부 두 사람과 함께 그해 11월 19일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도중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한 세 사람은 블랑(Blanc) 주교로부터 두 사람만 들어오고 한 사람은 남아서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고, 제비를 뽑은 결과 보두네 신부가 남게 되었다. 그 동안 인쇄일로 나가사끼에 건너온 코스트(Coste) 부주교를 만났고, 1885년 8월에야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다음 6개월 뒤에는 경상도 신나무골로 갔고 거기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여, 이듬해에 전라도 지방을 맡게 되었을 때에는 이젠 모국어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박해가 사라져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全州) 시내에 정착하였는데, 그 때가 1891년이었다. 당시 전주에는 신자집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을 때에는 몇 사람의 신부가 나누어 맡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신자수가 급격히 불어났었다.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신부는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임지로 내려가 폐허가 된 교회 재건에 전심하였다. 동학란으로 교세는 오히려 늘어나 이젠 더 큰 성당을 지어야만 했으므로 그는 모든 경비를 절약했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도 팔아 성당 건립을 위해 충당하였다. 이 때 건립한 전동(殿洞) 성당은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리하여 헌신적으로 한국인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1915년 5월 27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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