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학교 [한] 普德學校

평양교구 순천본당의 낙민면(樂民面) 교우들이 1909년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1911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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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2 [라] Bonifatius

Bonifatius(672-754). 성인. 주교. 순교자. 영국태생으로 독일 선교의 개척자. 축일은 6월 5일. 영국의 베네딕토회에서 로마 지향성, 선교활동 등에 대한 앵글로색슨 수도회의 이상을 흡수하고 71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양하고 719년 선교사목(宣敎司牧)에 대한 그레고리오 2세의 인가를 로마에서 직접 받았다. 그 뒤 유럽 대륙 게르만 민족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여 689년에 피핀(Pepin) 2세에 의해 정복되어 프랑크 왕국령이 된 프리시아(Frisia) 선교를, 721년 헤세(Hesse)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어 튀링지아와 마인츠 교회의 정비에 노력하여 740년 이 지역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교회회의를, 742년 쇠퇴일로에 있는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 프랑크 교회 공의회를 개최(742-747년)하였다. 744년 그의 가장 유명한 수도회를 풀다(Fulda)에 설립하였는데 이곳은 독일 종교 및 정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754년 프리시아 선교 여행에서 53명의 일행과 함께 이교도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뒤 풀다는 순례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는 1874년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선교활동의 특색은 독일 교회를 로마와 긴밀히 연결시키고 철저하게 교황에 의탁, 여기서 권한을 위임받고 보호와 인도를 요청하였다는 데 있다. 또한 모 수도회와 분원사이의 관계를 긴밀히 하여 사업에 지속성을 부여하였으며 베네딕토 수녀원에 활동적인 교육사목을 소개, 그 분야에 있어서 다른 수녀들의 사업을 수세기나 앞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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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1 [라] Bonifatius

Bonifatius, 8세(1234?-1303). 교황(재위 : 1294-1303). 이탈리아 귀족 가에타니가(家) 출신. 볼로냐(Bologna)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을 공부한 후 교황청에서 근무하였고, 파리 공의회(1290년)에서 교황사절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추기경(1291년)을 거쳐 1294년 무능한 성 첼레스티노(Celestinus) 5세를 폐위시키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초기부터 많은 반대파를 갖게되었는데 그 중에는 연로한 전 교황의 강제퇴위 문제로 반목하던 ‘급진적 엄격주의파’와 그의 인척등용을 비난하는 콜로나가(家) 등이 있다. 재위 중 발생한 가장 큰 사건으로 프랑스 필립(Philip) 4세와의 교황권과 세속 왕권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교황청이 100년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프랑스교회에 대한 과다한 과세를 징수하고, 교황의 동의없이 왕은 성직자에게 어떠한 세금도 부과할 수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 필립 5세에 대해 교황은 파문으로 위협하였고, 필립 5세의 편에 콜로나가와 영성 프란치스코회가 합세, 교황 승직의 불법성과 이단 등을 이유로 교황을 단죄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교회가 사상 최초로 대사(大赦)의 해로 선포한 130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교황은 영적 권력과 속세의 권력에 대한 중세의 유명한 대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황이 세속 제왕을 임명하고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아냐니(Anagni)에서 콜로나가의 무리에게 유괴되어 목숨을 위협받고 난 뒤 곧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에 의해 절정에 다다랐던 교황권이 새로이 상승하는 국가주의 및 왕권과 적절한 세력균형을 이루지 못해 일어났다. 또한 교황 측의 실패에는 교황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가문의 세력 팽창에 대한 집착 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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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라] Bonaventura

Bonaventura(1221-1274). 성인. 축일은 7월 14일. 이탈리아의 스콜라 신학자. 교회학자. 주교. 추기경. 이탈리아 비테르보 지방에서 태어나 20세 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파리 대학을 마치오 동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1248-1255년). 이 때 동료교수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으로(1257-1273년), 동회의 조직을 강화하는 등 혁신에 진력, 동회 제2의 건설자로 일컬어졌다. 첼라노(Celano)의 토마스(Thomas)의 저서를 바탕삼고 그것을 보족(補足)해서 공간(公刊)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Legendamajor S. Francisci)는 그 후 동회의 공인된 전기(傳記)가 되었다.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의 교황선거 때(1271년) 그를 강력히 지지, 그 공으로 알바노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1273년). 제 2차 리용 공의회(1274년)에 신학 고문으로 초빙되어, 회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성 토마스 이후 최대의 스콜라 학자로서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학파를 지도하였다. 당시는 스콜라학의 전환기여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부흥과 아울러 새로운 신학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점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대립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는 우리들의 이성(理性)의 빛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추상설을 주장하였고,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이 신앙깊은 그리스도교도에게 분배하는 신비적 조명(照明)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신비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를 중시, 거기서 중요한 요소를 흡수했고. 또한 이른바 ≪가짜 디오니시오 문서≫를 애호하여 신비적 사색에 몰입하였다. 그의 소설(所說)에서 다소 모순과 불철저함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롬바르도(Petrus Lombardus)의 ≪명제집≫에 대한 주석(註釋)으로 명저(名著)를 남겼다. 그밖에도 ≪전집≫이 있고, 또한 ≪Doctoris Seraphici S. B. Opera omnia, Ad Claras Aquas≫(10권, 1882-1902), ≪Commentarii in IV libros Senteniarum Petri Lombardi≫, ≪Breviloquium≫,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Itinerarium mentis in Deum≫, ≪Collationes in Hexaemeron≫, ≪De mysterio S. Trinitatis≫. ≪Quaestiones dipputatae≫ 등의 저서가 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諡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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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밀파 [한] ∼派 [영] Bogomiles

카타리파(Catharists)의 한 분파로 이원론(二元論)을 제창한 이단. 10세기 초 불가리아 지방에서 생겨나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에 영향을 미치다가 이슬람교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들에 의하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타나엘(Satanael)이었다. 이 사타나엘이 세계와 아담을 창조하였고, 그의 아버지인 신이 아담에게 영혼을 주었다. 그런데 사타나엘이 신에게 반역하여 천국에서 쫓겨나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사타나엘은 선한 인간을 타락시켜 벌을 받아 고통 속에 살게 하였다. 인간이 사타나엘의 영향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신은 그의 둘째 아들 예수를 인간들에게 파견하였다. 예수는 사타나엘을 정복한 후 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지상에다 성령을 남겨두고 갔으며, 유일하고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인 보고밀파에게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보고밀파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아세례, 수세, 결혼, 성체 속에 그리스도가 있음, 성화상, 주의 기도를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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