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 [원] Besi(de Bezi)

Besi(de Bezi) (?~?). 주교. 중국 강남(江南) 교구장. 이탈리아에서 출생. 선교사로 중국에 입국하여 강남 교구장으로 재직하면서 김대건(金大建) 신부, 페레올(Ferreol) 주교, 다블뤼(Daveluy) 주교 등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上海)의 주교관에 들른 조선 선교사들을 도와주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김대건 신부가 최양업과 같이 1842년 9월 조선 입국 도중 상해에 들렀을 때와 1845년 6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맞아들이려고 상해에 왔을 때 등 두 번에 걸쳐 김대건 신부를 도와주었다.

[참고문헌] 李元渟 · 許寅 編著, 金大建의 편지, 정음사, 1975/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80.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베움커 [원] Baeumker, Clemens

Baeumker, Clemens(1853-1924). 독일의 중세철학사가. 파더본(Paderborn)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죽었다. 뮌스터(Munster) 대학을 마치고 1877년 모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뮌스터의 대학 예비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883년 브레슬라우 대학, 1900년 본 대학, 1903년 스트라스부르크 대학교수를 거쳐 뮌헨 대학 교수로서 1912년 헤르틀링(Georg von Hertling) 교수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는 수많은 저술과 강의를 통해 독일의 토마스 아퀴나스주의 부활에 있어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중세철학사가로서 아비세보른(Aviceborn), 알파라비(Alfarabi), 세어셸(Shareshel)의 알프레드(Alfred), 브라반트(Brabant)의 시제이(Siger) 등 철학자에 관한 연구 및 철학교본 편집의 선구자였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학술지 (Munster 1891~)의 창간이었으며, 평생 동안 이 잡지의 편집을 지도하면서 비텔로(Witelo)에 관한 그의 주요한 연구논문을 게재하였다. 가장 영향을 준 저술은 ≪Die chrisliche Philosophie des Mittelaltes≫(Berlin-Leipzig 1909, 1913, 1923)이다. 그의 장서는 쾰른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연구소(A1bertus Magnus Institut)에 기증되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베버 [원] Weber, Norbert [관련] 조선

Weber, Norbert(1870-1956).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회 총원장(Erzabt). 독일에서 출생. 1895년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수도서원을 했으며 1902년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08년 유럽을 방문한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를 만나 그의 초청을 수락하고. 이듬해 이 회의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세우고 또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자신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입국, 4개월간 머무르며 조선의 전통문화를 두루 살피고 이에 심취하여 귀국한 뒤 조선방문 때의 사진, 그림, 메모 등을 모아 1915년 ≪조선≫(朝鮮, Im Lande der Morgenstille)이라는 저서를 간행하였다. 1925년에는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조선에 재입국하여 당시 베네딕토회 선교사들의 관할지역이었던 함경남북도와 북간도 및 수원 · 안성 · 공주 · 해주 · 청계동 · 평양 · 금강산 등을 여행, 이를 바탕으로 선교활동과 조선의 풍습 · 민속 · 토속신앙 · 불교 등을 소개한 기록영화를 제작했고. 귀국 후 2차 조선여행 때의 자료를 모아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의 불교와 예술을 소개하는 ≪금강산≫(金剛山, In der Diamantbergen Koreas)을 저술 1927년 간행하였다.

1931년 총원장직을 사임한 뒤 당시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회가 관할하던 동(東)아프리카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56년 사망하였다. (⇒) ≪조선≫

[참고문헌] 가톨릭시보, 제1151호, 1979. 4. 22 / 교회와 역사, 제60호.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베를렌 [원] Verlaine, Pau1

Verlaine, Pau1(1844-1896). 프랑스의 가톨릭 시인. 메츠 태생. 파리에서 교육을 받고 고답파(高踏派)의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71년 천재소년 랭보(Jean-Nicolas Arthur Rimbaud)와의 숙명적인 만남으로 생활이 난맥에 빠져, 이 소년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로 방랑 여행을 떠났다. 1873년 랭보에게 권총을 쏘고 2년형을 복역, 옥중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시집 ≪예지≫(叡智)를 썼다. 출옥 후에는 술과 매춘부에 빠져 다시 방탕생활로 돌아갔고, 시인으로 문명(文名)이 오를 무렵엔 시료(施療) 병원에 수용되었으며 ‘저주받은 시인’으로 파리 빈민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남긴 시집으로는 그 밖에 ≪말없는 연가≫, ≪행복≫, ≪애가≫, ≪저승에서≫ 등이 있다. 말라르메(S. Malarme), 랭보와 함께 상징파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베르모렐 [원] Vermorel, Joseph

Vermorel, Joseph(1860-1937). 파리 외방전교회원. 교구선교사. 한국명 장약슬(張若瑟). 1860년 3월 28일 프랑스 리용(Lyon) 교구의 생 클레망 드베르(Saint Clement de Vers)에서 출생.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7년 9월 24일 사제신품을 받고 고국을 떠나 1888년 1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1918년에 맹장수술을 받으러 북경에 갔던 일을 제외하고는 50년 동안 한번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이 오직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한국에 도착하자 곧 첫 임지인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그는 서울에서는 이미 볼 수 없게 된 상복을 입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891년 보두네(Baudounet) 신부와 함께 피정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도중 도둑떼를 만나 모든 것을 강탈당하는 등 갖은 박해를 겪으면서도, 그는 인내와 관용으로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였다. 1893넌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선종하자 그 후임으로 용산신학교에 부임하여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어 원산(元山)본당을 1년간 맡고 있을 때 간도(間島)에서 찾아온 김영렬(金英烈)이라는 청년에게 영세를 주어, 간도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케 함으로써, 장래의 연길교구가 탄생하게 하였다.

1897년에는 강경(江景) 가까이 있는 나바위에 본당을 건립하였다. 나바위 본당에 있을 당시인 1899년 교우와 외교인 사이의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폭도들이 베르모렐 신부댁을 습격하고 신부를 강경포(江景浦)까지 납치한 강경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를 거쳐 평리원(平理院)의 판결로 6개월만에 종료되었다. 1911년 대구교구가 분립되면서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1919년 드망즈(Demange)주교가 주교회의 참석차 로마로 가 있을 동안 잠시 주교좌성당에 가 있었을 뿐 1931년까지 나바위 본당을 떠나지 않았다. 1931년에 연로하여 본당 사목직을 떠나 성 바오로 수녀원의 지도신부가 되어 고아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여생을 바치다가 1937년 5월 31일 77세로 선종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