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취득 [한] 朴取得

박취득(?~1799). 순교자. 세례명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홍주 면천(沔川) 고을에서 덕망이 높아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이 굳고 용기가 대단하였다.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용감하게도 관장에게 나아가 무죄한 사람들을 가두고 매질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니 석방하라고 진언하여 이로 인해 체포되었고 해미(海美)와 홍주 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1797년에 다시 홍주고을에 박해가 일어나, 잠시 피신하였으나 그를 잡지 못한 포졸들이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 가자 자진하여 관아에 출두하여 수감되었다. 옥리들이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매우 심한 고문을 가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자 음식과 물을 일절주지 않아서 8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끝에 기절하고 말았다. 옥리들은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옥 밖에 내다버렸지만 그는 죽지 않고, 다음 날은 오히려 상처도 깨끗이 아물어 다시 관장에게로 나아가서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때려도 죽지 않으니, 차라리 목을 매서 죽이면 될 것이다”라고 죽여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참수치명을 하지 못하고 1799년 2월 29일(음) 해미 옥에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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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한] 朴趾源

박지원(1737~1805). 실학자. 소설가.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의 손자, 사유(師愈)의 아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 이군문(李君文)에게 사사하고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문인이 되어 실학을 배웠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후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가 밀려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은거, 1780년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에 가서 청의 학자 곡정(鵠汀), 민호(珉皥) 등과 서학(西學)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한편, 중국인들의 실생활에 파고든 서구 과학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정치 · 경제 · 국방 · 천문지리 · 문학 등 다방면의 신학문을 소개하는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하였다. 1786년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1789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1790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제능 영(齊陵令), 1791년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등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낸 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고, 1799년 왕명으로 2권의 농서(農書)를 저술,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양양부사(襄陽府事)로 승진했으며, 사후 정경대부(正卿大夫)로 추증되었다. 북학파의 영수로서 홍대용, 박제가(朴薺家)와 함께 사회 ·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봉건 조선조의 여러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북학파 고유의 학풍을 정립했고, 서학 수용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적인 기적 측면(器的側面)만을 수용하고 윤리적인 이적 측면(理的側面)은 배격하였다.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담총외기≫(談叢外記), ≪연암속집≫(燕巖續集) 등이 있고 고루한 양반과 무능한 위정자를 해학적 표현으로 풍자한 한문소설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등 10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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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환 [한] 朴重煥

박중환(?~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으로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여주에서 체포되어 서울의 포도청에서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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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호 [한] 朴準鎬

박준호(1884~1936). 교육자. 세례명은 요한. 충남 논산(論山) 출신.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한 후 1908년 전북 고산 되재[升峙]본당에서 경영하는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 교사로 임용되어 교내에 측량강습소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실기(實技) 위주의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후 잠시 관직에 있다가 1922년 서울교구에서 남대문 상업학교(南大門商業學校)[東星中 · 高等學校의 전신]를 인수하자 관리직을 사퇴하고 남대문 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24년부터는 계성보통학교(啓星普通學校) 교장을 겸직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교회 내외에 많은 인재를 양성, 배출시켰다. 또한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종현(鐘峴, 지금의 明洞)본당 청년회 회장, 서울교구 청년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정지용(鄭芝溶), 장면(張勉) 등과 청년회지 <별>을 창간하는 한편 청년들을 위한 많은 강연 · 강습회를 개최했고, 이러한 청년운동에 대한 공로로 1931년 프랑스 한림원(翰林院, Academie)으로부터 명예 고등한림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6년 9월 16일 지병인 위암(胃癌)으로 사망, 종현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1940년 12월 18일 동성상업학교 교내에 그의 유덕을 기리는 ‘박교장 기념 강당’(朴校長紀念講堂)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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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 [한] 朴宗源

박종원(1792~1840). 순교자. 성인(聖人). 회장. 성녀 고순이(高順伊)의 남편. 일명 이선.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축일은 9월 20일.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로 매우 궁핍하게 생활했으나 모친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교우인 고순이와 결혼,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그 후 1837년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에 임명되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회장의 직무에 열중하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는 한편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다가 10월 26일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 체포된 아내와 함께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 내고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한 달째 되던 1840년 1월 31일 6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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