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한] 朴齊家

박제가(1750~1815).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 · 수기(修其) · 재선(在先),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莥) · 위항도인(葦杭道人). 본관은 밀양(密陽). 승지 평(坪)의 서자. 1769년 북학파(北學派)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들어가 실학을 연구했고,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우하며 합작시집 ≪건연집≫(巾衍集)을 저술, 1776년 그 책이 청(淸)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時文四大家)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 1778년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을 수행하고 청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의 학자들과 서학(西學)에 대해 담론하며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익혔다. 귀국 후 조선조의 정치 · 사회의 여러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는 한편, 이듬해 규장각 검서관(奎章閣 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1790년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다시 청에 다녀온 뒤 군기사정(軍器寺正)이 되었고, 다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 청에 다녀왔다. 1790년 춘당대시 무과(春塘臺試武科)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이듬해 평택현감이 되었으며, 1798년 정조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 진소본(進疎本)을 저술하였다. 1801년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로 청에 다녀온 뒤, 동남성문(東南城門)에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연루되어 함북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으나 1805년 풀려나왔다. 북학파 고유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했고 서학 수용에 있어서도 서학의 과학기술적인 기적 측면(器的側面)은 수용하고 윤리적인 이적 측면(理的側面)은 배격하는 북학파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서학의 과감한 수용을 위해 서양 선교사의 영입이 필요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북학의≫,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㽔詩稿), ≪유정집≫(㽔亭集) 등이 있다.

박제가(1750~1815).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 · 수기(修其) · 재선(在先),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莥) · 위항도인(葦杭道人). 본관은 밀양(密陽). 승지 평(坪)의 서자. 1769년 북학파(北學派)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들어가 실학을 연구했고,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우하며 합작시집 ≪건연집≫(巾衍集)을 저술, 1776년 그 책이 청(淸)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時文四大家)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 1778년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을 수행하고 청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의 학자들과 서학(西學)에 대해 담론하며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익혔다. 귀국 후 조선조의 정치 · 사회의 여러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는 한편, 이듬해 규장각 검서관(奎章閣 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1790년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다시 청에 다녀온 뒤 군기사정(軍器寺正)이 되었고, 다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 청에 다녀왔다. 1790년 춘당대시 무과(春塘臺試武科)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이듬해 평택현감이 되었으며, 1798년 정조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 진소본(進疎本)을 저술하였다. 1801년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로 청에 다녀온 뒤, 동남성문(東南城門)에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연루되어 함북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으나 1805년 풀려나왔다. 북학파 고유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했고 서학 수용에 있어서도 서학의 과학기술적인 기적 측면(器的側面)은 수용하고 윤리적인 이적 측면(理的側面)은 배격하는 북학파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서학의 과감한 수용을 위해 서양 선교사의 영입이 필요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북학의≫,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㽔詩稿), ≪유정집≫(㽔亭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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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한] 朴正一

박정일(1926~ ). 주교. 제2대 제주(濟州) 교구장, 제6대 전주(全州) 교구장. 세례명 미카엘. 평남 평원군 동송면 청용리에서 출생. 1944년 12월 평남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8년 사제직의 뜻을 품고 덕원(德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성신대학(聖神大學)[가톨릭신학대학의 前身]에 편입했고, 이어 1952년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중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9년 신학석사 · 철학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안젤리쿰대학에 입학, 1962년 동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부산 초량본당 보좌신부, 1964년 경남 문산본당 주임신부, 1967년 경남 진주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고 1970년부터 1977년 다시 전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현재 전주 교구장으로서 전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이밖에 주교회의 전국위원회의 이주사목위원회의 담당주교,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 사회 주교위원회 · 200주년 주교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박정일 주교는 전주교구장을 거쳐 1988년 마산교구 제3대 교구장을 역임한 후 2002년 11월 11일 은퇴하였다. 현재 전주교구 제7대 교구장은 1990년 착좌한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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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달 [한] 朴有達

박유달(?~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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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래 [한] 朴永來

박영래(?~1866). 순교자. 회장. 세례명 요한. 일명 내호.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딸을 데리고 상경하여 짚신장수를 하던 중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체포되어 10월 25일(음 9월 17일) 양화진에서 김중은(金重殷)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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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기 [한] 朴阿只

박아기(1783~1839). 순교자. 성녀(聖女). 세례명 안나. 축일은 9월 20일.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으로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모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고. 18세 때 교우인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고 정성껏 교육시켰다. 기해(己亥)박해 초인 1839년 2월 남편, 큰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으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혼자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고통을 참아내며 평온한 얼굴로 함께 갇힌 교우들과 위문 오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후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의하여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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