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손 [한] 朴鳳孫

박봉손(1976~1839). 순교자.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막달레나.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세기경 시골로 출가하여 딸 둘을 낳고는 과부가 되자 친정에 돌아와 계모 김 세실리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1834년 입교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己亥) 박해가 일어나자 친정식구와 함께 살고 있던 여러 가구의 교우들은 피신했으나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초 잠시 집에 들른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최후로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9월 26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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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록 [한] 朴保祿

박보록(?~1839).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충남 홍주(洪州) 출신. 순교자 박사의(朴士儀)의 아버지. 33세 때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예비교우로 있을 때인 1794년에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겨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이런 전비(前非)를 뉘우쳐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가기로 맹세하고, 외교인이 많이 사는 고향에서는 세정에 끌려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하고 충청도 단양(丹陽)의 산골로 들어가 신앙생활에 몰두하였다. 그는 조용한 이곳에서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덕행을 쌓아 외교인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1827년 박해가 이곳까지 몰아치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경상도 상주로 피신했으나, 그 해 4월 그믐날 상주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 감옥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구(大邱)감영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언도받고도 곧 집행되지 않은 채 여러 해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9월 27일(음) 71세로 옥사,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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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한] 朴秉來

박병래(1903-1974). 의학박사. 성모병원 초대 원장. 본관(本貫)은 밀양. 세례명 요셉. 호(號)는 수정(水晶). 동성상업학교장을 지낸 박준호(朴準鎬)의 아들. 충남 논산(論山) 출생으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하고 1936년부터 성모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20년 동안 봉직하면서 서울교구 의료사업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의학상식의 보급을 위해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등에 고정필자로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 가톨릭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6.25사변 중 군의관으로 입대, 가톨릭의사협회원들과 함께 수복지역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1956년 2대 성모병원장과 가톨릭대학 의학부 3대 학장을 겸임하는 한편, 혜화동 본당 총회장으로 성당신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성모 병원장과 가톨릭대학 의학부 학장직에서 물러나 성 루가병원을 개원,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원으로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많은 가난한 환자를 돌보았다. 1974년 5월 15일 오랜 숙환으로 사망했는데, 사망하기 전 1930년부터 일제의 문화재 수탈을 방지할 목적으로 자신이 수집한 362점의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추도사에서 “성실과 사랑에 찬 고매한 인격으로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고쳤던 인술(仁術)의 실천자”라고 추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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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학교 [한] 博文學校

1900년 김교원과 강준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인천 박문국민학교의 전신이다.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드뇌(Eugene Deneux) 신부가 학교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여자부를 병설하였다. 1917년 2개의 학교를 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시 중구 답동 3번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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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마르타 [한] 朴∼

박마르타(?~1868). 순교자. 고종(高宗)의 유모. 1866년 남종삼(南鍾三)이 조정에 러시아 세력의 견제를 위한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할 당시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의 심부름으로 궁궐과 조정의 반응을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에게 전해 주었다가 방아책이 무시되고 오히려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충청도 홍천(洪川)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868년 2월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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