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카 양식 [한] ∼樣式 [라] basilica [영] basilica

초기의 교회양식.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공인(313년)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장방형 성당 건축 형태이다. 같은 이름의 직사각형 로마건물을 모방하는 한편, 카타콤바의 예배 장소를 본 딴 흔적도 보인다. 보통 원주(圓柱)가 늘어선 회랑(回廊)이 달린 안마당이 있으며 3개 이상의 출입구를 통해 본 건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앙에는 큰 회중석(會衆席)이 하나 있으며, 양쪽으로 2개, 혹은 4개의 회랑이 열주(列柱)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초기에는 원주로 수평의 처마도리를 지탱하였으나 후기에는 아치를 사용하였다. 회중석의 지붕은 양옆 회랑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으며, 채광층(採光層)에는 창문이 달려 있다. 동쪽으로 복도가, 맞은편의 아치나 반원의 후진(後陣)부분에는 제단이 놓이는데 제단은 후진의 한가운데 벽으로부터 돌출해 있다. 제단 바로 아래에는 부분적으로 바닥 높이 아래로 내려가서 수호성인의 유해를 담고 있는 순교자의 묘 혹은 지하 성당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바실리카란 교황에 의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특별한 성당들만을 일컫는 말이며, 대 · 소로 나뉜다. 로마 교회에는 4개의 대 바실리카가 있는데, 라테란(교황을 위한 바실리카),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그리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 등이다. 로마와 전 세계에는 수많은 소 바실리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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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회칙 [한] ∼會則 [영] The Rule of St. Basil

성 바실리오(St. Basilius)가 폰투스(Pontus)에 있는 자기가 세운 수도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쓴 수도계율로, 문답체(問答體)로 되어 있다. 이것은 55조(條)로 된 ‘대계율’(大戒律)과 313조로 된 ‘소계율’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덕(德)과 악덕을 논하고, 수도정신, 순종, 청빈, 세속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계율은 법규적(法規的)인 것이 아니고, 바실리오 수도원에서 현재 영위하고 있는 생활양식을 보충하는 것이며, 수도생활의 구체적 조직의 여러 문제에는 언급하지 않고, 수도자의 영적(靈的) 도야에 대한 이상(理想)의 확립이 주안점(主眼點)이다. 계율의 텍스트에는 성서의 말씀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계율은 동방(東方)의 수도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스, 트라키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남이탈리아에 유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교회에서의 계율 중의 주류(主流)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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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 [라] Basilius

Basilius(330?-379). 성인. 축일은 1월 2일. 주교. 교회학자. ‘대(大)바실리오’로 잘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카파도치아(Cappadocia)의 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났다. 양친, 부계(父系)의 조부모, 두 형제, 누이도 모두 성인, 성녀이다. 그는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이다. 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신앙심이 깊어, 그와 동생인 뉴사의 그레고리오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다. 카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아 이교적 교양과 그리스도적 교양을 함께 터득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다가 누이의 권유로 수도생활에 들어가,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티나를 편력, 후에 358년 체사레아 부근의 이리스 강변에 은수자(隱修者)로 정주하였다. 이곳에서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 구교(舊交)를 두텁게 하면서 함께 선교에 종사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대의 학우(學友)인 로마황제 율리아누스의 궁정으로의 초빙을 거절했으나, 당시의 교회정세가 그에게 조용한 생활을 허락치 않아,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의 요청에 따라 아리우스파의 황제 발젠스에 대해 정통신앙 옹호를 위해 체사레아로 갔다. 수년 후 370년 에우세비오의 후계자로 주교가 되어 그 직위로 생애를 마쳤다. 체사레아에서 교회분쟁의 와중에 뛰어든 그는 에우노미오스가 거느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성령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멜레시오(Meletius)를 안티오키아의 감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로마의 감독 다마소(Damasus) 1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 등과 혹은 격렬히 논쟁하고, 혹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박학하고 웅변·정치적 수완이 뛰어났으며, 인격도 고결하였다. 성격은 섬세하면서도 전투적이었으며, 비범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어 동방의 수도원 조직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체사레아 교회에 건설한 성당, 병원, 빈민보호시설 등 건물은 치밀한 계획하에 운영되었다.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은 서한집과 ≪성령론≫(De Spiritu Sancto), ≪에우노미스 반박론≫(Adversus Eunomium, 3권),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의 협력에 의한 오리제네스(Origenes) 저작으로부터의 발췌 ≪Philocalia≫ 등이다. 교리면에서는 반(半)아리우스주의자와 니체아 신경을 화해시키기 위해 힘쓰고, 그들이 말하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란 말은 니체아 신경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와 같은 뜻을 지녔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서거한 2년 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사실상 종료된 것은 그의 공적으로 돌려도 될 것이다. 그는 아폴리나리오(Apolinarius)와 서신교환이 있었다는 것, 저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양성(兩性)의 구별보다는 일치를 강조한 것 때문에 일부 지역으로부터 아폴리나리오설을 신봉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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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원] Barth, Heinrich

Barth, Heinrich(1890~ ). 스위스의 철학자. 바젤 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인간적 지식의 연관을 추구하면서 고전철학에서 현대철학에 걸친 광범한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올렸다. 그의 신(新)칸트주의적 인식론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에서 어떻게 정위(定位)되는가를 ≪현상의 철학≫(Philosophie der Erscheinung, 제1부, 1941)에서 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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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오의 밤 [라] Nox Sti. Bartholomaei

위그노전쟁(1562-1598년)이 전개되고 있던 1572년 대학살이 일어난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지칭한다. 당시 프랑스 국왕 샤를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카타리나는 위그노파의 지도자인 나바라 출신의 앙리와 화해하기 위해 그의 딸을 앙리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결혼일은 8월 23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생각을 바꾸어 기즈가(家)가 공모하여 위그노파에 대한 학살을 시도하였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유혈의 결혼식’이 되었다. 파리에 이어 지방에서도 위그노파에 대한 무서운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화해는 깨어지고 위그노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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