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과수원 [한] 美果收園

1886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 내에 있던 모든 회(會)의 설립목적과 규칙을 비롯하여 회원(會員)들이 지켜야 할 본분을 적어 놓은 책.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감준으로 씌어진 이 책에는 예수성심회 · 건도종회 · 성모매괴회 · 성모성의회 · 성모성심회 · 성모칠고회 · 선종회 · 전교회 · 영해회 등에 대하여 필사(筆寫)되어 있는데, 그 후 인쇄가 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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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한] ∼書 [라] Prophetia Micheae [영] Prophecy of Micheas

1. 시대와 인물 : 미가 예언자 생존시의 시대상은 2열왕 17-20장에 잘 나타나 있다. 미가가 생존해 있던 당시는 한 마디로 비극적인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복 야욕으로 가득 찬 아시리아는 사마리아를 함락했고(기원전 722년), 센나케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기원전 701년). 따라서 유다 왕국의 일부는 아시리아 제국에 병합(倂合)되어, 종교생활에까지 위기를 맞을 정도로(2열왕 21장) 풍전등화의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모레셋(미가 1:1, 예레 26:17) 출신의 미가는 아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한 펠리시대 지방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미가 1:10-15). 아시리아인들이 침공할 때 예루살렘으로 피해 온 남서지방의 농부출신인 미가(이사 14:28-32 참조)는 당시 수도 예루살렘의 귀족계층에서 조장한 사회불의를 보자 크게 분노하였다. 우리는 거칠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농부의 모습에서 그를 상상할 수 있다(미가 3:8 참조). 일면 아모스의 강직한 성품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선포한 신탁이나 설교는 동시대인인 이사야 예언자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미가 1:10-16과 이사 10:27 이하, 미가 2:1-5과 이사 5:8 이하, 미가 5:9-14과 이사 2:6 이하를 비교). 그렇지만 미가는 농촌이라는 자기 출신의 배경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예언자적 반성과 설교는 수도 예루살렘의 귀족들에게 큰 파문을 던졌다(예 : 3장의 시온의 운명). 그는 사제들 뿐 아니라 예언자들에게도 심한 독설(毒舌)을 퍼부었다. 아마 미가는 사제나 직업 예언자들과는 별다른 접촉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되게 비판한 이유는 그들의 부정직한 태도 때문이었다. 또한 미가는 그들이 신봉하고 있던 거짓 신비주의와 물질주의적 의미에 기초한 그 신비주의의 성전맹신(聖殿盲信, 미가 3:11-12)을 규탄하였다. 사람들은 미가가 성전에 대해서 규탄한 신탁을 오랫동안 기억하였다(예레 26:18).

2. 미가서의 구조 : 미가서의 짜임새는 인위적인 인상을 많이 풍긴다(Eissfeldt 참조). 그 구조는 1-3장(위협 설교, 2:12이하는 제외), 4:1-5:8(약속 말씀), 5:9-7:6(위협 설교), 7:7-21(약속 말씀)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각 부분을 미가가 직접 집필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위협 설교들은 미가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3장(2:12이하 제외)과 5:9-7:6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5:9-13은 이사 2:6-8과 비슷한 내용이며 5:14는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부연된 구절이다[미가가 직접 집필했다고 주장하는 J. Willis, Anthenticity and Meaning of Micah 5:9-14, ZAW, 1969, pp. 353-368의 논문 참조]. 맏물의 봉헌(2열왕 16:3, 21:6)을 상기시키는 6:7은 시대적으로 볼 때 기원전 721년 이전의 사건을 전제로 삼고 있다. 약속의 말씀들은 아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4개의 단편(7:7-10, 7:11-13, 7:14-17, 7:18-20)으로 구성된 전례문(典禮文, 7:7-20)[Bo Reicke, Liturgical Tradition in Mic 7, Harv. Th. Rev. 1967, p. 349-367]은 유배 이후의 작품인 것 같고, 조르즈(George)도 미가가 직접 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스펠트(Eissfeldt) 같은 학자는 이것이 미가의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일면 그의 논증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처음에 나오는 약속 말씀(4-5장)의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더욱 분분하다. 이 말씀들은 질서정연한 순서에 따라 편집된 소귀절들로서, 예레 30-31장, 에제키엘서, 제2 및 제3 이사야의 영향 하에 미가 4-5장을 위해 편집된 단구들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미가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르노(B. Renaud)의 말을 빌면[B. Renaud, Structure et attache litteraie de Michee IV-V, Paris 1964, p. 86] 아무리 빨라도 5세기에 씌어진 작품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카펠루드(Kapelrud)는 상기 단구들이 사마리아가 함락되자 바로 쓰여진 전례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이스펠트는 4:1-5:8이 3:12의 저주를 보완하기 위해 미가서에 첨가된 구절이라고 하며, 다이슬러(Deissler)는 이 첨가 구절 중 4:14, 5:3, 5:5b. 9-14만이 미가가 직접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Les Petits Prophetes(BPC), p.299. 반대의견: J. Willis, Mic 4:14-5:5. A. Unit. VT. 1968, pp. 529-547 참조]. 그러나 조르즈는 4:9-10a. 14, 5:1-5, 8-14가 미가의 글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SDB, v. col. 1258]. 그리고 카젤(H. Cazelles)은 미가 4-5장이 미가가 직접 쓴 작품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지리적 요소들이 많다는 설을 편다[H. Cazelles, “Histoire et geographie en Mi 4:6-13” Fourth World Congress of Jewish Studies, Jerusalem, 1967, pp. 87-89]. 어떻든 이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많은 이론을 제기시키고 있다[J. Willis에 의하면 3-5장은 통일된 단락으로써 ‘행복-불행’의 교차적 배어법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3. 메시지 : 미가 3:8에는 그의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한 마디로 음울한 분위기를 던져주고 있으나, 바로 이것이 미가 메시지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다. 예언자들의 말이 언제나 공격만 받는다는 사실(미가 2:6 이하)을 잘 알고 있는 미가는 평화만을 낙관하는 설교가들의 영합주의(迎合主義)가 오히려 그들의 카리스마를 질식시키고 굴욕을 자초케 한다(미가 3:5-7)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미가는 수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는 자기 고향을 휩쓴 아시리아의 침공을 심판의 징조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심판을 예고한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며, 옴리가(家)의 왕들에게서 전형적인 예(미가 6:16, 1열왕 21)를 찾아볼 수 있는 사회불의 때문이었다(미가 1:2-7, 2:1-11)[1열왕 20-22장은 미가 2장의 주해서이다. H.M. Weil, Mi 2 explique par 1R 20-22, RHR, 121, 1940, pp. 146-161 참조]. 또한 이 심판의 동기는 예부터 전해져 오던 신앙의 전승을 해석하던 당시 인간들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미가 2:6 이하, 3,11b).

미가는 아모스(아모 9:7)와 달리 전통적인 교의(敎義)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 교의란 야곱에게 베푼 축복(미가 2:7), 시온에 거하시는 야훼(미가 3:11), 이집트에서의 탈출사건(미가 1:15) 등이다. 백성들은 이러한 교의가 지닌 본질적인 면은 무시하고 허례허식에 젖은 신심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주님과 맺은 각별한 관계를 스스로 파기(破棄)하게 되었다(“너희가 …을 하였다”라는 질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가 2:8참조). 이는 바로 야훼와의 결별(訣別)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가 예언자의 메시지에는 커다란 희망도 비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 아니면 적어도 남은 자(un reste, 미가 4:7, 5:2, 6:7)[R. de Vaux, Le Reste d’Israel d’apres les Prophetes, RB, 1933, p.526-539(Bible et Orient, Paris 1967, pp. 526-539) / S. Garofalo, Le nozione profetica del Resto d’Israele, Roma 1944, F. Dreyfus, La doctrine du Reste d’Israel chez le Prophete Isaie, RcScPhTh, 1955, p. 361-375 / U. Stegemann, Der Restgedanke bei Isaios BZ, 1969, p. 161-186]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의 서광이 비친다. 남은 자는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할 것이며’(미가 6:5), 그분의 요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정의와 헤세드(hesed, 仁慈)와 겸손(미가 6:8)은 아모스의 정의, 호세아의 사랑, 이사야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해당한다. 미가는 이 세 가지 기본적인 덕(德)을 종합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성실, 아브라함에게 표하실 헤세드는 원래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표이다(미가 7:18-20). 또한 유다산골의 농부였던 미가는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약속이 실현되리라 믿었다. 영광스런 가문에서 왕이 탄생할 것이다. 그 왕은 무능하고 불성실한 이스라엘 목자들을 대신하여 왕국의 통일을 이룩하고, 하느님의 법도에 따라 그 왕족을 통치할 것이다(미가 5:1-4). 그리고 베들레헴 에프라타에서 탄생한 다윗의 후예는 인류가 염원해 온 평화의 왕자가 될 것이다. (徐仁錫)

[참고문헌] A. George, Michee(Livre de), SDB, V. col. 1252-1263, 1952/ B. Renaud, Structure et attache litteraire de Michee IV-V, Paris 1964 / A.S. Kapelrud, Eschatology in the Book of Micah VT, XI, 1961, pp. 392-405 / J. Lindblom, Micah, literarisch Untersucht, Helsinki 1929 / E. Hammershaimb, Einige Hauptgedanken in der Schrift des Propheten Miach, ST, 1961, p. 11-34 / J. Willis, The Structure, Setting and Interrelationships of the Pericopes in the Book of Micah, Vanderbilt 1966 / J. Willis, The Structure of Micah 3-5 and the Function of Micah 5; 9-14 in the Book, ZAW, 1969, p. 197-214 / L. Monloubon, Michee, in: Introduction critique a l’Ancien Testament, Paris 1973, p. 37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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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일기 [한] ∼日記 [프] Journal de Mgr. Mutel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된 날(1890. 8. 4.)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1933. 1. 23. 사망) 거의 매일 써놓은 일기. 총 6,000여면의 분량에 뮈텔 주교 개인의 사정과 교구장 재임기간 동안 일어났던 교회 내외의 주요한 사건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뮈텔 주교는 40여년간 한국 천주교회를 다스렸고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뮈텔일기>는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뮈텔일기>에 기록된 주요 사건들로는 우선 용산신학교 · 명동 대성당 · 약현 성당 등의 건축, 본당증설, 계성학교 · 남대문상업학교(東星中高等學校) · 가명학교의 설립, 양로원 · 보육원 등의 사회사업, 경향신문 · 경향잡지 등의 언론 · 출판사업, 시복조사와 시복식, 대구 · 원산 · 평양 · 연길 교구의 증설 등 주요 교회사건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는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또 3.1 운동 당시 신학생들의 시위 참가와 이로 인한 신학교의 잠정적 폐교에 대한 기록들은 일제하 천주교회의 항일운동을 재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로서 평가된다. 그뿐 아니라 뮈텔 주교가 조선의 정세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체험한 동학혁명(東學革命) · 청일전쟁(淸日戰爭) ·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 · 3.1 운동 등에 대한 기록들과 이 사건들을 뮈텔 주교 나름대로 분석·평가한 기록들은 한국사의 보충을 위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뮈텔일기>는 뮈텔 주교 사후(死後) 명동 주교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면서 대부분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대전교구로 이적되고 서울교구에 남은 일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구(舊) 용산신학교 자리로 거처를 옮길 때 그곳으로 옮겨졌고, 그 뒤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옮겨져 지금은 동(同)회의 고문서고(古文書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공개되어 사미스트회(Samist) 소속으로 전주(全州) 교구에서 사목중인 디디에 세르스트반스(Didier t’Serstevens, 한국명 池正煥) 신부가 난해한 필체를 판독하여 정서(正書)하고 있으며 이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번역 중이다.

[참고문헌] 崔奭祐, 뮈텔주교의 일기(교회와 역사 제103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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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문서 [한] ∼文書 [프] Documents de Mgr. Mutel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수집해 놓은 일련의 문서들. 총 1만 3,451건에 달하는 서한(書翰) · 공문(公文) · 신문기사(新聞記事) · 전보(電報) · 유인물 · 명함(名啣) · 안내장 · 외교문서(外交文書)들로서 1871년에서 1925년까지의 교회사 및 한국사와 관련된 내용의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수집자인 뮈텔 주교에 의해 교회문서와 기타문서로 분류되어 보관되었고, 뮈텔 주교 사후(死後) 명동대성당 지하 고문서고(古文書庫)로 옮겨져 다른 교회자료들과 함께 보관되어 오다가 1965년 명동 대성당에 보관된 모든 교회자료들과 함께 한국교회사연구소(韓國敎會史硏究所)에 이장(移藏)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崔奭祐) 신부와 사학자 이원순(李元淳) 교수가 명동에서 온 자료들을 정리 분류하면서 이 문서들을 발견하여 이를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라고 명명(命名)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뮈텔문서’로 불리고 있다.

<뮈텔문서>는 사용된 언어에 따라 동양어(東洋語) 문서와 서양어(西洋語) 문서로 구분된다. 동양어 문서는 한글문서 390건, 국한문(國漢文) 혼용문서 126건, 한문(漢文)문서 716건, 일어(日語)문서 55건, 총 1,287건이고, 이를 문서의 성격에 따라 분류해 보면 공문서가 410건, 사문서가 652건, 교회문서가 216건이다. 동양어 문서 초기의 것은 한문으로 씌여진 것이 많고, 후기에 올수록 한글로 씌어진 것이 많이 나타난다. 서양어 문서는 총 1만 2,164건으로 라틴어문서가 2,068건, 프랑스어 문서가 9,518건, 영어(英語)문서가 571건, 독어(獨語)문서가 4건, 이탈리아어 문서가 2건, 스페인어 문서가 1건인데, 라틴어와 프랑스어 문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서양 어문서 대부분이 교회문서이고 또 뮈텔 주교를 비롯하여 문서와 관계된 성직자들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뮈텔문서> 속의 주요 사건 내용으로는 188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 1894년의 동학혁명(東學革命) · 갑오경장(甲午更張) · 항일의병모금사건(抗日義兵募金事件),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8년의 명동 대성당 준공 및 보부상(褓負商)과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천주교인 위협사건, 1899년의 교민조약(敎民條約) 및 천주교인들의 황성(皇城)신문사 난입사건,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 1904년의 한 · 불 · 노 비밀 3국동맹(韓佛露 秘密三國同盟) 및 선교조약(宣敎條約), 1905년의 울릉도 영유권 분쟁, 1909년의 교회운영학교 인가에 대한 정교(政敎)분쟁 등인데, 이밖에도 많은 교민(敎民), 정교 분쟁의 내용이 들어있고, 1910년 이후의 문서들에서는 교회 내의 사목(司牧) 관계가 주된 내용이다.

<뮈텔문서>는 한 개인이 수집한 최대의 문서로서 무도 개인과 관(官)이 직접 기록한 원사료(原史料)라는 점, 그리고 이 문서들이 수집된 기간이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日帝) 초기에 이르는 한국사(韓國史)의 일대 전환기였다는 점에서 사료(史料)로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같은 시기의 사료인 <법안>(法案),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등과의 상호보완을 통한 근대 한국의 정치·사회·사상·외교사 연구와 한불조약 이후 교회와 정부와 관계, 동학과 천주교, 188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의 교회 모습 등 근대 한국 교회사를 재조명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李元淳, 未公開史料 Mutel 文書, 韓國史硏究, 3집, 韓國史硏究會, 196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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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원] Mutel, Gustave Charles Marie

Mutel, Gustave Charles Marie(1854-1933)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조앵빌 중등학교와 랑그르 소신학교를 졸업하여 1873년 10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1877년 2월 24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고 만주에 머무르면서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정리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 등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80년 5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 하였으나 조선 관헌들의 엄한 감시로 성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에 가서야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할 수 있었다. 1881년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잠입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 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이 공포된 때라서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에 관한 자료와 기록 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으나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 6. 4)이 조인된 훨씬 뒤인 1890년 8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고 나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박해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예수성심신학교, 종현(鐘峴) 성당, 약현(藥峴) 성당 등을 준공시키는 이외에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Florete Flores Martyrum)는 그의 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1894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의 원본이 발견되자 곧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각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은 교황에게 진상하였으며(192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상황을 수집하여 1895년 ≪치명일기≫(致命日記)를 편찬하였다. 1904년을 전후하여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행적을 기록한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己亥日記) 한 벌이 발견되었는데 앞뒤의 일부가 상하여 이를 보충하고 서문을 붙여 1905년 ≪기해일기 뮈텔판≫을 간행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확장되는 교세에 따라 교계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기초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교구로 설정한 뒤 1920년에는 함경도, 간도지방을 분할하여 원산교구로 설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1923년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Fathers)의 한국 진출을 주선하여 1927년에 창설된 평양교구의 사목을 이관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여러 활동으로 19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1925년 3월 명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더욱이 1925년 7월 5일에는 그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 순교복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밖에 일제하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3년 1월 23일 80세의 생을 마쳤다. 주요 저서는 ≪Doc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1866≫,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1890-1933),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 1890-1927) 등이 있다.

[참고문헌] Mgr. Larribeau, Un grand Eveque missionnaire, S. Exc. Mgr. Grustave Mutel, Paris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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