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투쟁 [한] 文化鬪爭 [독] Kulturkampf [관련] 무류성

교회사(敎會史)에서 문화투쟁이란 보불전쟁(1871년) 후 독일에서 일어났던 반(反)가톨릭 교회운동을 말한다. 당시 독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을 염원했고, 그를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국의회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당(Zentrumspartei)이 가톨릭 신도들의 정치적 대변인이 되고 있음을 비스마르크는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당시 가톨릭내의 불편한 관계, 즉 교황의 무류권(無謬權)에 대한 실라부스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측과 따르는 측과의 대립, 알력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소위 구가톨릭교도(Altkatholiken)라 불리는 ‘반대파’들을 지원,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871년 프로이센 문교부의 가톨릭국(局)이 폐지되고 ‘설교단조규’(說敎團條規, 12. 10)가 발표되어 자유로운 설교가 제한당하였다. 이어 ‘학교감독법’(1872. 3. 11), 예수회원 추방령인 ‘예수회원법’(7. 4)이 발표되었고, 유명한 ‘5월법’이 뒤이어 발표됨으로써 성직자의 양성과 임명, 교회적인 징계권, 교회탈퇴 등은 국가의 지시에 따르도록 되었다. 1875년 ‘구 가톨릭 교인법’(7. 4)은 구 가톨릭 교도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용권(共用權)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1875년 ‘5월법’은 프로이센 내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며 수도자들은 추방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고, 예외적으로 병자간호에 종사하는 수도회만이 내각이 정한 바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급여차단법’(給與遮斷法, 1875. 4. 22)은 일련의 문화투쟁법을 인정하고 따른다는 서명을 한 ‘어용사제들’을 제외한 모든 성직자에 대해 국가는 재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사제들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이 모든 법의 실시는 경찰권을 동원하여 과료, 금고, 국외추방 등의 형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강제조치는 신자, 성직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바덴, 헤센, 다룸슈다트, 작센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정부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고, 오히려 가톨릭의 단결만 촉진하는 꼴이 되었다. 중앙당의 의석이 1873-1874년간의 1년 사이에 91석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자진하여 요구를 포기하였다. (⇒) 무류성

[참고문헌] H. Bruck, J.B. Kissling 공저, Geschichte der Katho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im 19 Jahrhundert IV 1 · 2, 1907-1908 / J.B. Kissling, Geschichte des Kulturkampfes, B. 3, 1911-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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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만 [한] 文濟萬 [관련] 무세

무세(Mousset) 주교의 한국명. ⇒ 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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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진 [한] 文∼

문윤진(?-?). 순교자. 세례명 미상(未詳). 천민 출신으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피신처중 한 집의 여종이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산골로 피신했으나 이 해 5월(음) 체포되어 공주(公州)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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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기교황 [한] 文藝復興期敎皇

니콜라오 5세에서 레오 10세까지의 교황 문예부흥기에 교황좌에 올랐던 이 시대의 교황에 대한 비난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 교황 가운데 어떤 이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지도자로서 의무를 옳게 이행하지 못했는가 하면 사생활에 수치스러운 잘못도 있었다. 이 시대의 교황사(敎皇史)를 훑어볼 때, 당시 세속화로 치달은 사회상이 교회의 영도자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 자체에 대한 죄를 저지른 교황은 없었고, 과학이나 예술의 면에서는 오히려 공헌이 큰 교황들이 많았다. 또 당시의 교황들은 종교면에서 중세의 사상계를 보편적인 근대생활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바도 컸다.

이 시대의 첫 교황인 니콜라오 5세(재위 : 1447-1455)는 과학 · 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를 계승한 갈리스토 3세(재위 : 1455-1458)는 인격면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인물로 법률의 대가이기도 하였으나 신흥예술과 문학에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비오 2세(재위 : 1458-1464)는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요, 정치가로서 유럽을 통해 손색없는 교황으로 평가받았다. 6년간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 군주와 민중의 호응을 얻어, 터키인의 지배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한 십자군의 동원에 온 정열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바오로 2세(재위 : 1464-1471)는 인문주의에 적극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선황(先皇)들이 채용한 교황청의 인문주의자들을 해고하고, 교황학사원까지 폐지하여 교양 없는 교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식스토 4세(재위 : 1471-1484)는 학식과 모범적인 덕행(德行)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총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나 불행히도 야심적인 친척들 때문에 문벌주의(門閥主義)에 휘말려, 교황의 주요 임무인 교회 내부의 개혁을 게을리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인노첸시오 8세(재위 : 1484-1492)는 젊어서 사생아를 둘이나 낳게 한 인물인데, 카란드리 추기경에게 잘 보인 인연으로 1472년에 사제가 되고, 이듬해에는 추기경이자 로마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로베레 가문에 충성을 바친 댓가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의 손녀 결혼식을 교황궁전에서 거행한 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실태였다. 그와 같은 풍토였으므로 추기경들의 세속적 생활과 낭비 또한 극심한 상태였다. 인노첸시오 8세는 그의 형제의 사생아인 13세 소년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후일 교황이 된 레오 10세이다.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는 스페인 부농의 아들이며, 갈리토스 3세의 조카로 교황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부유한 그는 일찍부터 외도에 탐닉하여 바노사 · 데 · 카타데이와의 불륜관계로 네 자녀를 둔 인물인데, 독성적(瀆聖的)인 방법으로 책략에 의해 교황이 되었다. 그런 선거가 치러질 수 있었다는 것은 교회 최고위층의 부패가 당시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비오 3세는 자애심이 많고 재능도 훌륭하였으며 과학, 예술을 사랑하는 교황이었다. 그러나 몸이 약하여 교황직에는 26일간을 있었을 뿐이다. 그를 이은 율리오 2세(재위 : 1503-1513)는 식스토 4세의 조카인데 의지력이 강한 분으로. 문예부흥의 진정한 지도자요 참다운 교황이었다. 거인인 그는 사제라기보다 황제로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의 속권(俗權)을 강화하고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전임 교황들이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던 교황령(敎皇領)을 잘 다스려 옛날의 위신을 되찾았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그를 “교황직의 구제자”요 “16세기의 대왕”이라고 쓰고 있다. 문예부흥기의 마지막 교황은 레오 10세(재위 : 1513-1521)이다. 그는 당시의 가장 고귀한 메디치 가문의 아들로, 교양이 풍부하고 낙천적이며 사치스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신앙으로 의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인정 많고 친절하여 예술, 문화도 사랑하였다.

[참고문헌] Pastor IV, F. X, Seppelt, Papstgeschichte bis zur Franzosischen Revolution II,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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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 [한] 文藝復興 [관련] 르네상스

⇒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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