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트르 [원] Maistre, Joseph Ambroise

Maistre, Joseph Ambroise(1808-1857).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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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치 [원] Merici, Angela [관련] 안젤라 메리치

Merici, Angela ⇒ 안젤라 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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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외방전교회 [한] ∼外邦傳敎會 [영] Maryknoll Missioners(M.M.), Maryknoll Fathers and Brothe

미국 최초의 가톨릭 외방전교회인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4월 27일 전미주교회의(全美主敎會議)의 인가를 거쳐 동년 6월 29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인준됨으로써 창설되었다. 이 회의 창설자는 보스턴(Boston) 교구의 월시(James A. Walsh) 신부와 롤리(N.C. Raleigh) 교구의 프라이스(Thomas F. Price) 신부였다. 뉴욕(New York) 대교구 호돈(Hawthorne)에 임시본원을 설치하고 출발했던 동 전교회는 1년 후부터 본원을 현재의 뉴욕주 오시닝(Ossining)에 자리 잡고 활동하였다.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세워진 본원 건물은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의 이름도 메리놀(Maryknoll)[마리아의 언덕]이라고 불려졌다. 동방(東方) 전교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메리놀의 근본 정신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두고 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22년 로마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平安道)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1923년부터 전교신부를 파견, 교구설정 준비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일제(日帝)가 교묘한 문화정치를 내세우는 등 정세가 매우 어지러웠던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평안도 지방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위해 평양(平壤) 교구의 설정을 서두르게 되었고 이미 중국과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한국 진출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이리하여 1923년 5월 10일, 이 회의 번(Byrne, 方) 신부가 교구설정 준비책임자로 서울주교관에 도착하고, 그 다음해인 1924년 10월 19일에는 3명의 신부와 메리놀회 수녀 6명이 교회사업을 돕기 위해 내한하여 의주(義州)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은산(殷山), 마산(馬山)[平南 江西郡星台面馬山場], 비현(枇峴) 등에 잇따라 본당을 세웠으며 마침내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방은 서울교구와 분리된 평양지목구(교구장 번 신부)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교구설정과 함께 메리놀회 수녀들도 교구내에 수녀원을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자선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1942년 6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되기까지 근 20년간 이곳에서 전교하였으며 동회 소속인 4명의 교구장이 그 책임을 맡아보았다. 이들은 종전 후 다시 한국에 진출하였으며 초대 평양지목이었던 번 주교는 1949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메리놀회원들도 많은 고초와 희생을 당해야 했으며

번 교황사절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한 끝에 그 해 11월 25일 북한 땅 중강진(中江鎭)에서 순교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포교책임을 맡았던 평양교구에서는 그 동안 선교활동과 함께 언론출판사업에도 힘써 1934년 1월 1일에는 출판부 위원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 편집책임자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신부, 김구정(金九鼎) 등 3인의 편집으로 <가톨릭 연구>지(1937년부터는 <가톨릭 朝鮮>으로 改題)를 1938년까지 월간으로 펴냈으며 1938년에 와서는 <성등>(聖燈)이란 잡지도 발간하였다. 비록 짧은 역사였지만 이 같은 평양교구의 출판활동은 교회와 일반사회에 문화적으로 크게 공헌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다.

1958년 7월 4일에는 새로 생긴 청주(淸州) 교구를 맡아 교구장에 파디(Pardy, 巴智) 주교가 취임했으며 4년 후인 1962년 3월 25일 방인 사제에게 넘겨주기까지 이 지역 사목에 종사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현재 한국에서 인천교구장인 맥노튼(McNaughton, 羅) 주교를 비롯한 10여명의 회원들이 본당사목, 소록도(小鹿島) 나환자병원, 충주 성심맹인학교, 노동청년회, 한국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참고문헌] New Catholic Encylopedia, 1966 / 서울대교구 總攬, 1984 / 天主敎平壤敎區史,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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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수녀회 [한] ∼修女會 [영] Maryknoll Sisters

1912년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수도회 내에서 메리 로저스(Mary Rogers) 수녀에 의해 창설된 수녀회. 1924년 10월 한국 진출.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수도회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7명의 젊은 여성들로 시작된 본회는 문화적 배경, 지역적 제한, 경제 · 사회 ·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코자 창설되어 1920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게 됨으로써 미국 최초의 외국선교단체가 되었다. 메리놀수도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메리 루시 루둑(Mary Lucy Luduc) 수녀 등 6명의 수녀가 1924년 평안북도 의주(義州)에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1925년 10월 내한한 6명의 수녀 중에는 2명의 한국인 수녀 장정온(張貞溫), 김 마르가리다 수녀가 있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격심해질 때까지 북한의 의주(義州), 진남포(鎭南浦), 영유(永柔), 신의주(新義州), 평양(平壤) 등지에서 본당활동,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에 종사하였고 그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가 1950년 부산으로 다시 진출하였다. 1942년 철수하기 전까지 한국분원의 본부를 영유에 설치한 후 그곳에 여자기예학원(女子技藝學院)을 설립하고, 시약소(施藥所) 및 고아원도 설립하여 기술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한국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前身)라는 수도회가 되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부터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활동도 전개하였다. 1950년 부산으로 다시 진출했으나 곧 일본으로 철수하였다가 1951년 부산으로 재입국하여 의료봉사 등을 하다가 1956년 충북 괴산군 증평읍(曾坪邑)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 부산에서는 메리놀병원을 개원하는 한편, 1963년에는 부속 메리놀간호전문학교를 개교했으나 1967년 부산교구로 이관하였다. 가브리엘(Gabriella Mulherin) 수녀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여 신용협동 교육연구원 및 오늘날의 신용협동조합이 있게 하였다. 이 밖에 인천에서의 교육활동을 비롯하여 경기도 강화읍 그리스도왕 의원과 경기도 백령도의 김안드레아 병원에서 의료사업에 도움을 주었고, 1973년부터는 서울 영등포 공업단지에서 조그마한 단체활동을 시작하였다. 1974년부터 전라남도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1976년부터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1977년에는 경기도 부평에서, 1979년부터 전라남도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각각 의료활동을 돕고 있다. 1963년 본원을 부산에서 서울로 옮긴 이후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86의 1소재 본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9개의 분원이 있으며 한국 본원장 게이에르(Laiares Geier) 수녀를 비롯한 회원들이 선교사업, 의료봉사활동, 교육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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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간호전문학교 [한] ∼看護專門學校 [관련] 지산간호보건전문대학

⇒ 지산간호보건전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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