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구유 [영] manger [라] praesepe

성서는 예수의 탄생 장면을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루가 2: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말구유에서의 예수의 탄생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다가 2세기초에서 3세기에 걸친 박해시대에 이르러 그림이나 모자이크에서 표현되었다. 오늘날 카타콤바의 여러 곳에서 박해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구유의 모습이 발견된다.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교황 테오도로(Theodorus) 1세(재위 : 642-649)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구유를 성모 대성당으로 옮겨왔다. 말구유를 만드는 풍속은 1223년, 이탈리아의 그레치오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가 성탄시기에 그레치오 성당에 베들레헴의 외양간을 본뜬 마구간을 만들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의 예수 탄생 사건을 재현시킴으로써 당시 신자들이 좀 더 실감나게 성탄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예수가 탄생한 구유에 대한 신심이 증가되었고, 작은 모형의 마구간을 만들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풍속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전 세계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들 특유의 풍습과 민족의상을 동원하여 갖가지 모양의 구유를 꾸미고 있는데, 그 재료와 방법 또한 다양하여 성탄구유를 위한 조각이 하나의 예술로까지 발전하였다. 각국은 이러한 토착화된 구유를 통하여 자기 민족과 그리스도 강생(降生)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마구간에는 예수 아기가 모셔진 구유와 마리아와 요셉의 상(像), 동물들과 목동들의 상이 놓여진다. 일반적으로 동방박사들의 상은 예수공현축일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까지 놓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12월 성탄이 가까워지면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각 본당을 중심으로 작은 모형의 마구간을 만들어 성탄 전야에 아기 예수의 상을 모시는 구유 안치식과 구유 예절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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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구복음 [한] ∼福音 [관련] 마르코의 복음서

⇒ 마르코의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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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유고 [한] 蔓川遺稿

편자(編者)와 간행연대를 알 수 없는 이승훈(李承薰)의 유고문집(遺稿文集). 서명(書名) 중 ‘만천’(蔓川)은 이승훈의 별호(別號)인 듯하다. 목차(目次), 본문(本文), 발문(跋文)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잇고, 본문은 다시 ‘잡고’(雜稿), ‘시고’(詩稿), ‘수의록’(隨意錄) 등 세 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잡고(雜稿)에는 이승훈의 저술인 <농부가>(農夫歌), 이벽(李檗)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 <십계명가>(十誡命歌) · <성교요지>(聖敎要旨), 이가환(李家煥)의 <경세가>(警世歌),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등이 수록되어 있고, 시고(詩稿)에는 <청앵유의>(廳鶯有依) · <평천십이곡>(平川十二曲) · <원적산중팔경>(元積山中八景) · <복한초>(復韓草) · <설월>(雪月) 등과 잡시(雜詩) 30여수(首) 등 모두 35수의 이승훈의 시문(詩文)이 실려 있으며, 수의록(隨意錄)에는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를 다룬 창시(創始), 조선(朝鮮) 역대 왕과 왕비의 즉위 · 승하연대를 기록한 본조연기(本朝年紀) 그리고 중국 · 일본 · 유구(琉球)의 거리, 도성의 궁전, 서울에서 각 감영(監營)까지의 거리, 중국 각 성(省)의 거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말(卷末)에는 ‘무극관인’(無極觀人)이라는 필명(筆名)으로 쓰여진 발문(跋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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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미사 [라] Missa Coenae Domini [영] Mass of Lord’s Supper [한] 晩餐∼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사실과 이에 관련되는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목요일 저녁 주의 만찬 시각을 택하여 만찬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은 예루살렘에서 유래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의 성주간 전례서에서 복구되었다. 이 전례서에 따라 이날 각 본당과 수도원에서 미사를 1회만 봉헌함으로써 성체성사 집전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만찬미사의 고유문은 이날 기념하는 여러 사건을 언급한다. 즉 구세주의 수난(입당송), 유다의 배반(축문), 성체성사의 건립(독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의 순명과 그의 부활(층계송),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복음), 주님을 기억하여 예를 행하라는 분부(영성체 후 축문) 등이 그것이다. 미사 후 성체를 다른 장소에 설치된 무덤제대로 옮기고 제대보를 벗기는 예절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벗은 몸을 상기시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만찬미사는 공동집전으로 봉헌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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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교구 [한] 滿洲敎區

요동(遼東) 교구라고도 하였던 만주교구는 1838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대목구(代牧區)가 되었다. 1898년 남만(南滿) 대목구가 되었고, 1946년 봉천(奉天)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만주교구의 설정은 한국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1827년 교황청 포교성은 조선 포교지의 선교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맡아 달라고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인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박해가 빈번하여 선교사의 조선 입국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에 입국 전에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나서 입국절차나 시기 등에 관해서 자세히 협의해야 하였다. 또 약속 장소인 조선 국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요동지방을 거쳐야만 했는데 요동지방에서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의 방해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려면 우선 이 지방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대목구로 독립시킴으로써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간섭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사실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을 접수한 교황청은 1838년 만주 대목구를 신설하고 만주와 요동지방을 관할하게 함과 동시에 만주 대목구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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