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주기 [한] 讀書週期 [영] cycle of reading [관련] 말씀의 전례

교회가 독서에 있어 구약 낭독문에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을 덧붙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2세기 로마에서 발견된다(Justin Martyr, Apologia 1.67). 4세기부터는 특정한 날에 특별히 선정된 중요한 절기에만 어느 정도 확정된 독서 성구집(Lectionary)이 니체아 공의회 이전 시대에 사용되었다. 이 시대 동안에 사용된 독서는 신약, 구약 및 시편을 삽입한 내용 등 몇 가지가 있었는데 통상적인 방식은 3개의 독서(구약, 서신 또는 사도들의 글, 복음서)였다. 그러나 5~6세기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에서 점차 2개의 독서(서신과 복음서)로 축소되었다. 이후 중세 초기에 구약성서는 통상적인 주일 전례에서 사라졌고, 연례적인 주기의 형성으로 성서의 많은 부분이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후기의 성인축일 주기(sanctroal cycle)의 과도한 발전으로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도록 신자들에게 성경의 보고(寶庫)를 널리 개방하여,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일정한 연수(年數) 내에 회중들에게 낭독해 주어야 한다”(51조)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공의회의 계획은 1969년, 개정된 독서 성구집을 반포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즉 교회력을 통해 모든 주일과 축일에 성서로부터 세 가지 독서가 지정되는데 이는 구약(제1독서), 사도서신(제2독서), 복음의 일부로써 ‘말씀의 전례’의 내용이 된다. 이들 독서는 주일은 3년 주기로 변해 A해 · B해 · C해로, 평일은 2년 주기로 변해 홀수해와 짝수해로 되어 있다.

이 주기를 사용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즉 1년을 A해로, 2년을 B해로, 3년을 C해로, 4년을 다시 A해로 계산하여 서기 해수를 3으로 완전히 나눌 수 있으면 그해가 C해, 3으로 나누고 1일 남으면 A해, 2가 남으면 B해가 된다. A해에는 마태오의 복음서가, B해에는 마르코의 복음서가, C해에는 루가의 복음서가 읽혀지고, 요한의 복음서는 각 해에 모두 읽혀진다. 이에 따라 층계송, 알렐루야도 3년씩 해마다 다른 것이 사용된다. 평일 독서는 2년마다 다시 돌아와 홀수인 해는 홀수 해, 짝수인 해는 짝수해로 이름이 붙여진 것을 읽는다.

이처럼 교회가 세 주기에 따라 여러 부분의 독서를 낭독하게 하는 이유는 신자들이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에 있어 계속되는 내적 연관성을 파악케 하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계시를 밝혀 주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실제적 생활에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 말씀의 전례

[참고문헌] C. Wiener, Presentation du nouveau lectionnaire, Maison-Dieu 99, 1969 / M.L. Guillaumin, Problemes pastoraux du nouveau lectionnaire, Maison-Dieu 99,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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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도 [한] 讀書~祈禱 [라] Officium Lectionis [영] Office of Readings

성무일도의 제1시(時)이며 과거의 조과(朝課). 이는 주로 성서와 성서 외의 문헌에서 각각 한 편씩 발췌한 독서, 시편에서 뽑은 3편의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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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대 [한] 讀書臺 [라] pulpitum [영] lectern [관련] 강론대

① 전례집전용 경본이나 성서를 펼쳐 얹기 위하여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허리 높이의 책상. 이는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용한 강론대를 이어받은 것이다. (⇒) 강론대 ②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동안 미사경본이나 성서를 펼쳐 얹어두는 책 받침대. 이는 제대위에 올려 사용하는 것이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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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가전 [한] 道學家傳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중국의 천주교 전래 이후 1680년대까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서양 선교사들의 약전(略傳)으로 1686년 북경(北京)에서 간행되었다. 저자(著者)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선교사 페르비스트(Verbiest, 南懷仁, 1623~1688)의 약전이 가장 상세하고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것으로 보아 페르비스트의 저술이 확실하다. 1925년 중국에서 발행되던 <성교잡지>(聖敎雜誌, Revue Catholique)의 11, 12월호에 이 책에 수록된 몇몇 선교사들의 약전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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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참설 [한] 圖讖說 [관련] 풍수지리설

1. 개념 : 세상의 운수(運數)와 인간의 미래를 예언하는 동양적 변혁사상의 일종. 일명 참위설(讖緯說). 도참(圖讖)의 도(圖)는 토지를 구분하여 기록한다는 의미의 글자였으나, 점차 그 의미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래에 일어날 사실의 비밀스런 상징(象徵, symbol), 전조(前兆, omen), 암시(暗示, suggestion)로서의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즉, 장래에 어떠한 사실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그 사상(事象)의 표지로서 어떠한 형식의 도(圖)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도참의 참(讖)은 참언(讖言), 참서(讖書), 참기(讒譏), 참록(讖錄), 참요(讖謠) 등의 준말로 볼 수 있는 바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비기(秘記)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참이란 장래의 사실, 특히 인간생활의 길흉화복(吉凶禍福),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이나 징조를 지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으며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도참사상은 지기쇠왕론(地氣衰旺論), 왕도회귀론(王都回歸論), 피란보신론(避亂保身論) 등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는 바, 이는 모두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과 풍수지리사상이 결합되어 제시된 이론이다. 지기쇠왕론은 망국(亡國)의 기지(基地)를 떠나서 지기(地氣)가 성한 것으로 주장되는 다른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왕도회귀론은 왕조(王朝)의 흥망을 자기쇠왕설에 근거하여 논하면서 국가의 중심지인 왕도가 국가멸망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 · 회귀한다는 사상이다. 피란보신론은 십승지지(十勝之地)에 관한 주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바와 같이, 전쟁과 흉년 및 질병의 피해를 모면할 수 있는 지역을 찾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 볼 때 도참사상은 사회적 전환기에 등장하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반영한 사회변혁사상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참사상이 비록 양기풍수설(陽氣風水說)에 주로 근거하여 전개된 것이라 하더라도, 도참사상과 풍수지리설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현재 ‘풍수도참’이란 용어가 많이 쓰여 지고 있지만, 이 용어는 풍수와 도참이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파악되어서는 아니 되며, 도참사상이 풍수지리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전개과정 : 도참사상은 중국 주대(周代) 말엽인 기원전 4~5세기경에 불안한 시대상과 관련하여 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에서 사회적 문제가 된 때는 한대(漢代)였으며, 당대(唐代)에 이르러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한국사에서 도참사상의 경향이 드러나고 있는 시기는 7세기 중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이때 백제의 멸망을 예언하는 참설(讒說)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러서는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들을 통하여 당(唐)의 도참사상이 강하게 전파되어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창건을 예언하는 각종 도참설이 성행하였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는 도참사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삼별초(三別抄)의 반란 때에도 도참사상이 등장하여 고려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데에 활용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고겨 말기에도 신돈(辛旽)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지기쇠왕설을 이용하여 충주(忠州)로 천도할 것을 전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에 이르러 왕조의 기반이 미처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도참사상은 계속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5세기 조선왕조에서는 왕조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도참사상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도참서들을 수거하여 소각시킨 바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엽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조산왕조에서는 위기의식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과 관련하여 도참사상을 기록한 감결서(鑑訣書)인 <정감록>(鄭鑑錄)이 출현하였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에 유행되던 수십 종의 감결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책은 <정이문답>(鄭李問答)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감(鄭鑑)과 이심(李心)으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조선의 국운(國運)을 예언하여 조선왕조의 멸망과 정진인(鄭眞人)에 의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병란(兵亂)을 피하기 위한 십승지지로 영월(寧越), 단양(端陽), 풍기(豊基)를 비롯한 10여 곳의 피난처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정감록>은 조선후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왕조적 질서에 저항하는 민중반란에 있어서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에서도 정감록적 발상이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참사상과 <정감록>이 가지고 있던 체제 부정적 측면 때문에 조선왕조에서는 이의 유포를 엄격히 금지시키려 하였지만 이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감록>은 일제시대와 광복 이후 한국전쟁의 기간에도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3. 평가 : 도참사상은 전근대적 자연관(自然觀)에 입각하여 사회변혁을 시도하려던 사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사회변혁의 필연성과 사회적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방편으로서 피란보신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점 때문에 도참사상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의 해석과 평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즉, 하나는 도참사상이란 불합리한 기존의 질서를 부인하는 사회변혁사상으로 파악하여 이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반면에 도참사상이란 과학성이 결연된 미신의 일종이며, 역사의 주체인 민중에게 회피의식만을 강조하는 망국적 견해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역사상으로 볼 때 도참사상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기능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정감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회피의식은 <정감록>의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조선후기 도참사상의 전형적 예인 <정감록>은 당시 성행하던 실학(實學)에서와 같은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고, 미래의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확고한 대안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정감록> 사상의 요체는 일종의 메시아니즘(Messiahnism)적 성격으로 파악되는 바이며, 이에 근거하여 이씨왕조(李氏王朝)의 변혁을 촉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도참사상이나 그 대표적 저서인 <정감록>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견해는 표시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적 요소 때문에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를 미신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도참사상은 일종의 역사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여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미신으로 판단하는 데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趙珖) (⇒) 풍수지리설

[참고문헌] 鄭鑑錄集成, 亞細亞文化社, 1984 / 朝鮮秘訣全書 / 崔昌祚 韓國의 風水思想, 民音社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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