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렬 [한] 金昌烈

김창렬(1927~ ). 주교. 제3대 제주(濟州) 교구장. 세례명 바오로. 황해도 연백(延白)에서 출생.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와 성신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8월 22일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곧 군종신부로 입대했고 1956년 제대 후 성신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0년 로마에 유학, 1962년 라테란대학에서 윤리신학을 연구한 후 1962년 도미(渡美)하여 뉴욕대학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다. 그 후 1963년 귀국하여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5년 가톨릭중앙의료원 원장,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성모병원장직을 겸임했고 1969년 가톨릭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73년 다시 가톨릭 중앙의료원원장으로 전임되어 1983년 11월 주교로 피명되기 전까지 재직했으며 이 때 한국 행복한 가정 운동 지도신부, 서울대교구 참사위원 및 인재양성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1983년 11월 21일 공석 중이던 제주교구장에 임명되어 1984년 1월 6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고, 1월 26일 착좌하였다.

[참고 : 김창렬 주교는 2002년 9월 2일 제주교구 교구장직을 퇴임하고, 이어 제4대 교구장으로 강우일 베드로 주교가 2002년 10월 8일 착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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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후 [한] 金震厚

김진후(1738~1814). 순교자. 세례명 비오 성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증조부(曾祖父).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살면서 입교 전에는 하급관직에 있으면서 미신을 믿고 속세의 재물과 권세를 탐내었다. 그러한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어떠한 동기에서 입교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입교 후에는 천주의 진리를 깨달아 모든 허영을 물리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심하였다. 그가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을 1791년부터이다. 그 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전주 · 홍주 · 공주 등 여러 감옥에서 무수한 고문으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켜 왔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辛酉) 대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 유배되었다. 1805년 다시 잡혀 해미(海美) 감옥에 압송되었을 때에는,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끝내 배교치 않았다. 그러나 사형언도는 내려지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옥중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지켜 그의 덕망과 고귀한 인품, 그리고 그의 굳은 신앙을 옥리들에게까지 감화를 주었다. 그는 1814년 10월 20일(음) 76세를 일기로 옥사 순교하였는데, 그 원인이 고문에서인지 병사 또는 아사(餓死)로 인한 것인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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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한] 金振聲

김진성(?~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청송에서 경주진영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경주에서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의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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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한] 金宗漢

김종한(?~1816).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본명은 한현(漢鉉). 김진후(金震厚)의 셋째 아들로 성녀 김데레사의 부친이며 김대건(金大建)신부의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태어나 친척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부친 김진후가 박해로 인하여 다년간 옥중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동시,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경상도 안동(安東) 가까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17년 동안 숨어 살면서 오직 기도와 고신극기(苦身克己)로 덕행을 쌓으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을해(乙亥)박해가 일어나 1815년 4월 23일(음) 안동 포졸들에게 잡혀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수감되어 배교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 마침 배교하고 석방되는 김윤덕을 만나자 그의 잘못을 꾸짖어 다시 개심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수한 고문과 감언이설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그의 굳은 신앙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사형집행이 무기 연기되자, 그는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없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약 20개월을 옥중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형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여러 통의 편지를 쓴 귀중한 기록을 남겼는데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드디어 대구 감영에서 참수되어 영광의 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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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륜 [한] 金宗倫 [관련] 진목정

김종륜(?~1868). 순교자. 세례명 루가. 경주 김씨 계림군파 17대손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얼릴 적에 영세, 입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피해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駕項里]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언양을 거쳐 울산 죽령(竹嶺, 대나무고개)에 들어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회장을 만났고 얼마 후 김해에서 온 허인백(許仁伯, 야고보)을 만났다. 이들 셋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경주땅 산내(현재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 있는 소래동 단수골이란 석굴(石窟)을 발견, 그 곳을 피난처로 삼고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868년 5월 ‘덕산묘지 도굴사건’의 여파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셋은 이 때 경주아문의 포졸들에게 잡혔다. 경주아문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8월 울산 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틀 후인 8월 14일(음 7월 28일) 장대벌 형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조애에 의해 수습되어 사형장 근처의 다리밑에 가매장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3인의 유해는 월성군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되었다. 1932년 5월 29일 대구 감천리 공원묘지로 이장되었고, 1962년 10월 25일 석곽에 모셔져 공원묘지 산 위에 있는 성모석상 앞으로 옮겨졌으며 1974년 10월초 다시 신천동 복자성당 구내로 옮겨졌다. (⇒) 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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