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업이 [한] 金業伊

김업이(177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막달레나. 어려서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항상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守貞)을 원했으나 모친의 반대로 교우청년과 결혼했고, 중년에 이르러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를 봉양하며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한아기(韓阿只) · 김아기(金阿只) 등과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하다가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의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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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홍 [한] 金洋洪

김양홍(1874~1945). 신부. 초대 전주(全州) 교구장. 세례명 스테파노. 1900년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전북 진안(鎭安)의 어은동을 근거로 전북 장수(長水), 남원(南原), 무주(茂侏), 용담(龍潭) 등지의 18개 공소를 맡아 사목과 전교에 힘썼다. 1931년 전라도 지역이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자 감목대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7년 전남 지역이 광주(光州) 지목구로, 전북 지역이 전주(全州)지목구로 설정되자 전주지목구장에 임명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방인 교구장이 되었다. 전주지목구 설정 당시의 교세는 신부 14명, 교우수 1만 7,527명, 성당 36개, 공수 190개로 이는 모두 김양홍 신부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1941년 일제의 탄압과 노령으로 인해 벅찬 교무행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해 11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석동(石洞)본당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이듬해 광주교구로 이적되어 나주(羅州)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중 1945년 5월 3일 72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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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기 [한] 金阿只

김아기(1790~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결혼 후, 장년에 이르러 친정 언니의 권면으로 늦게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여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신문 중에 “나는 오직 예수 ·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는 한 마디로 신앙을 고백한 후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형조로 이송되자 형조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 마리아밖에 모르는 아가다가 왔다고 반겨 맞아 주었다. 그 뒤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代洗)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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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우 [한] 金時佑

김시우(1781~1815). 순교자. 세례명 알렉스. 충청도 청양(靑陽) 출신. 반신불수의 몸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지였으나 신앙만을 굳게 지켜 신자의 본분을 지켰음은 물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1814년 부활절 날, 배교자의 밀고로 노래산(老來山)의 교우들이 잡혀갈 때, 자기를 병신이라고 해서 잡아가려 하지 않자, 눈물로 호소하여 함께 잡아가기를 간청하였다.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그는 오히려 창조주의 존재, 강생과 상선벌악(賞善罰惡)등 중요한 신조를 웅변으로 설교하여 관원들도 그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감사(監司)는 다시 말을 못하도록 턱을 부수는 고문을 자행하면서까지 그의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1815년 34세로 옥사, 동정(童貞)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함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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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성 [한] 金順性

김순성(?~1862). 천주교 배교자. 밀고자. 세례명 요한. 일명 여상.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유다로 불린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치열해지자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박해를 이용,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 지도급 교우들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을 밀고, 처형케 했고,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의 하인 정화경을 속여 앵베르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를 체포하게 하였다. 교우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참석, 교리문답과 성서를 읽으며 모범을 보이는 체하면서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공정을 염탐하였고, 또 자신의 밀고에 의해 체포된 처녀 교우들을 농락하려고 하였다. 앵베르 주교 체포의 공로로 오위장(五偉將)의 관직을 얻었으나 1840년 죄인으로 몰려 전라남도 신지도(新智島)로 유배되었고, 1853년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1862년 이재두(李載斗) 등과 공모하여 중종(中宗)의 후손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하전(李夏銓)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 이해 7월 18일(음)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으로 참수(斬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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