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한] 金壽煥

김수환(1922~ ). 서울 대교구장. 대주교. 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여 1941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 과정, 성신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도일(渡日), 조오찌(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고 이 대 동남아 일대에서 여러 번 사선을 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성신대학(聖神大學)[가톨릭대학의 전신]에 입학, 사제수업을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대구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경북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장, 1955년 경북 김천본당 주임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원을 역임한 후 독일 뮌스터(Munster)대학에 유학, 동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29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하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고 이듬해 3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산 펠리체(Titolo di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ella) 명의 추기경으로 서임식을 가졌다. 그 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위원장을 역임하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미국 노트르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0년 과도정부의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보수적인 주교단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현실과 노동문제에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인권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로,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적 권익으로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교회는 이러한 공동선의 추구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후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한국 천주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고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종교로서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구중서, 대화집 : 김수환 추기경, 지식산업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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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박 [한] 金世博

김세박(1761~1828). 순교자. 세례명 암브로시오. 관명(冠名)은 언우.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金範禹)의 친척으로 한국교회 창설직후 입교했고 입교 후 아내와 자녀들의 천주교 배척으로 집을 나와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회서적을 베껴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가는 곳마다 외교인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아름다운 덕행과 부지런한 기도, 극기하고 청빈한 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와 1815년 을해(乙亥)박해를 모면했으나 1827년 정해(丁亥)박해가 일어나 자신이 머물고 있던 안동(安東)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이해 5월(음력)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자수, 1개월 동안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대구감영에서도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박보록(朴保祿), 박사의(朴士義) 부자(父子), 이재행(李在行)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하던 중 1828년 10월 27일(음력) 대구감영에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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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학 [한] 金聖學

김성학(1870~1938). 신부. 세례명 알렉시오. 평남 순천군 은산(殷山)의 교우가정에서 출생. 어려서 가족과 함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랑, 경기도 이천(利川)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였다. 1883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4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던 중 한국에 신학교가 새로 설립됨에 따라 1892년 귀국,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897년 12월 18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藥峴聖堂, 현 중림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가족들이 살고 있는 황해도 매화동(玫花洞)에서 6개월을 머무른 후 1898년 경북 가실(현 칠곡)본당 주임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했고, 1901년 김천본당으로 전임, 그 곳에서 10년 동안 사목하면서 김천지방 천주교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1911년 황해도 장연(長淵)본당 주임신부, 1916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라틴어교수를 역임하고, 1922년 평양본당(관후리본당)으로 전임되어 14년간 평안도의 여러 지방을 사목하였다. 1936년 충남 공세리본당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던 중 1938년 9월 8일 뇌출혈로 선종, 공세리 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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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임 [한] 金成任

김성임(1787~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마르타. 경기도 부평(富平) 출신으로 결혼에 실패한 후 상경, 장님 점쟁이와 재혼했고, 이 때 시집식구의 한 사람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남편이 사망하자 미신을 끊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집을 떠나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천한 일과 궂은 일을 하는 가운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매임(李梅任)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 · 이영희(李英喜) 자매, 김누시아(金累時阿) 등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에서 5차례의 주뢰형을 받아 다리와 팔을 쓰지 못했으나 견뎌 냈고 형조에서 다시 한 차례의 형문을 이겨 낸 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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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한] 金星禹

김성우(1795~1841).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안토니오.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의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년에 이르러 양친을 여의고 서울로 이주,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집을 공소로 개조하고 교우들을 돌보며 신부를 보필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는데,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이겨났고, 오히려 옥(獄)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며 함께 갇힌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 그 중 2명을 입교시켰다.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도를 맞은 후 이튿날인 4월 29일 1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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