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섭 [한] 梁基涉

양기섭(1905∼1982). 신부. 세례명 베드로. 평남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薪枝里)에서 숙천섭가지본당 초대 주임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의 복사를 지낸 양덕현(梁德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10월 26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졸업과 함께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평양 관후리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1934년 신리(新里)본당 주임신부, 1939년 숙천(肅川)본당 주임신부, 1942년 진남포(鎭南浦)본당의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교구로 이적한 뒤 초대 경향신문 사장으로 1년간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10년 동안 한국 교회를 위해 활약했고, 1957년 12월 귀국, 성신대학 의학부(가톨릭대학 의학부의 前身) 부장 겸 성모병원장에 취임하고 이어 1958년 서울교구 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60년 명동본당 주임신부, 1962년 일산본당 주임신부, 1965년 가평본당 주임신부, 1967년 신당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973년 일선사목에서 은퇴하고 원주교구의 교회유적지 배론[舟論]에 들어가 배론성역화사업을 주도, 10여년간 개발에 헌신하여 황무지였던 배론의 면모를 일신시켜 놓았다. 그러나 1982년 4월 3일 자신이 배론에 새운 건축물의 축성식을 11일 남기고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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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한] 楊根

초기 한국 교회지도자 중의 하나인 권철신(權哲身) · 권일신(權日身) 형제의 고향으로 현지명은 경기도 양평(楊平).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윤유오(尹有五)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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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 [한] 羊羔 [관련] 어린 양

고양(羔羊)과 함께 옛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던 말로 구약(舊約)시대의 파스카 축제 때 제물로 바쳐지던 어린 양(羊)을 뜻한다. 현재는 ‘어린 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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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검론 [한] 兩劍論 [영] two swords [관련]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교권과 세속권)의 관계에 대한 중세의 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우리는 복음서에 의해 교회가 영적 세계와 세속을 지배할 두 개의 칼을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 성속(聖俗) 양검(兩劍)은 교회의 권위 속에 있다. 영적인 칼은 교회가 사용하고, 세속적인 칼은 교회를 위해서 사용된다. 영적인 칼은 사제가 사용하고, 세속적인 칼은 왕과 병사에 의해 사용된다. 세속적인 칼은 영적인 칼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세속적인 권위자는 영적인 권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그의 회칙 <우남 상탐>(Unam Sanctam)에서 밝히고 있다. 이 교리는 왕과 사제가 다 같이 교회에 속해 있던 중세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양검론은 황제의 세속적인 권위가 점차 증대되어 가면서 황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황제측은 두 개의 칼은 하느님께서 칼을 가진 자에게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칼은 세속적인 영역에서는 교권에 독립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국가와 교회 병치론(竝置論)을 주장하였다. 한편 교황측은 루가복음 22:38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두 개의 칼을 우선 베드로에게 주셨기 때문에 세속적인 칼은 영적인 칼에 복종해야 하고, 명예와 품위 면에서도 영적인 권위가 세속적인 권위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검론은 루가복음 22장 38절에 성서적 근거를 두고 있다. (⇒) 교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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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센 [원] Jansen, Cornelius Otto [관련] 얀세니즘

Jansen, Cornelius Otto(1585∼1638). 얀센주의를 일으킨 플랑드르(Flandre)의 신학자. 북네덜란드 아코이(Accoy)의 가난하지만 경건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유트레히트(Utrecht), 루뱅(Louvain)대학 및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614년 네덜란드에서 서품을, 1617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곧 루뱅에 있는 성 풀셰리(Sainte-Pulcherie) 신학원의 총장이 되었다. 1619년경 벨기에 신학자 바유스(Baius)의 사상에 대한 논쟁을 통해, 그는 은총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이를 옹호하였는데, 뒷날 결실을 맺어 1627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완성을 보았고, 사후 2년이 지난 1640년 출판되었다.

1624년 그는 예수회에 대항하여 대학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630년에는 성서에 관한 칙임(勅任)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1635년에는 루뱅대학 총장이 되었고 1년 뒤에 이프르(Ypres)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얀센의 주장 가운데는 초자연계의 부정, 은총을 거부하든가 받아들이든가의 선택의 부정이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은 자는 구원받고, 그 밖의 사람은 구원받지 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하여 1653년 5개의 주요명제가 이단적임을 못박아 배척받았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얀센의 영향은 가톨릭 교회의 윤리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 얀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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