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원] Shakespeare, William

Shakespeare, William(1564~1616). 영국의 극작가, 시인 잉글랜드 중부의 소읍(小邑) 스트래프퍼드 에이븐(Stratford-on-Avon)에서 태어났다. 농산물 상인인 부친 존(John)과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인 모친 아든(Mary Arden) 사이의 셋째 자식인 그는 태어나면서 영세를 받고, 1571년부터 1578년까지 고향의 라틴어학교에 다녔다. 1577년경부터 가운(家運)이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가사(家事)를 도와야 하였다. 1582년 18세 때 8세 연상의 앤 해더웨이(Anne Hathaway)와 결혼, 이듬해 장녀 수재나(Susanna), 1585년 남매 쌍둥이 햄닛(Hamnet)과 주디드(Judith), 모두 1남 2녀를 두었다. 1585년 말 샬코트(Sharlecote) 경과의 사이에 말썽이 빚어져, 그는 런던으로 도망하여 극단에 입단, 말단배우에서 각본가(脚本家) 조수가 되고, 1590년경에는 극작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2편의 장편서사시 ≪비너스와 애도니스≫ (Venus and Adonis, 1593), ≪쿠크리스의 능욕≫(The Rape of Lucrece, 1594)으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1594년에는 당시 영국 극계를 양분(兩分)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관할의 궁정부속극단 단원이 되면서 재정적 여유도 생겨, 1597년에는 고향에서 제일 큰 주택을 매수, 런던에도 주택을 구입하였다. 1599년 런던의 글로브극장 공동소유자가 되고, 귀족 다음의 계급인 젠틀먼 칭호를 얻었다. 1603년 제임스 1세의 궁정부속 배우, 1608년 블랙 플라이어즈 극단의 공동소유자가 되었으나, 1601년 극장의 지주(持株)를 매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반쯤 은퇴한 몸으로 풍요로운 여생을 보냈다.

그는 1610년경까지 희극 · 비극 · 사극 등 도합 37편의 희곡작품을 썼는데, 그 제작연대에 따라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1590-1595)는 사극≪헨리6세≫ (Henry VI), ≪리처드 3세≫(Richard III)로 시작되는 습작시대로, 비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Titus Andronicus),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dt), 희극 ≪실수의 희곡≫(Comedy of Errors), ≪베로나의 두 신사≫(Two Gentlemen of Verona),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 등 전체적으로 미숙하지만 젊은 정감에 넘치는 작품들이 많았다. 제2기 (1596-1600년)는 ≪한 여름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베니스의 상인≫(Merchant of Venice), ≪뜻대로 하셔요≫(As You Like It) 등 원숙한 희극이 많고, 그밖에 ≪리처드 2세≫(Richard II), ≪헨리 4세≫(Henry IV)와 비극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있다. 생활 경험을 쌓고 인생에 대한 탐구도 깊어져서 그 필치는 더욱 예리해졌다. 제3기 (1601-1609년)는 이른바 4대 비극인 ≪햄릿≫(Hamlet), ≪오델로≫(Othello), ≪맥베드≫(Macbeth), ≪리어왕≫(King Lear)을 비롯해 인생의 진실에 투철한 대비극 작품이 탄생하였다. 그밖에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rtra), ≪코리올레이너스≫(Coriolanus) 등 심각한 희극이 많다. 제4기(1610-1616년)는 로맨스극 ≪심벨린≫(Cymbeline), ≪겨울밤 이야기≫(A Winter’s Tale), ≪템페스트≫(The Tempest) 등 만년의 맑디맑은 심경이 반영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가톨릭 교도, 영국 국교도, 청교도,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 의해서 저마다 자기네에 속하는 사람으로 주장되어 왔다. 영국 국교도 측에서는 셰익스피어와 그의 자식들 모두가 스트래트퍼드의 국교회에서 영세를 받았고, 그 자신의 유해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상당량의 가톨릭의 가르침, 교리, 예배식 등이 묘사되어 있고, 또 그의 부친 존 세익스피어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란 증거가 뚜렷하다. 왜냐하면 1592년 우스터(Worcester)의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 존의 이름이 42명의 국교 거부자 명단 속에 들어 있으며, 존의 사망 후 발견되 유서(遺書)에 가톨릭 신앙이 고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성장 후 가톨릭을 일상생활화 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그는 작품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사유(思惟)와 형식의 문제로서 충분히 다름으로써 그리스도교 문학의 근대적 전환에 크게 기여한 지도적 문학가였다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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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벤 [원] Scheeben, Matthias Joseph

Scheeben, Matthias Joseph(1835~1888).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독일에서의 신스콜라철학의 유력한 선구자. 로마의 그레고리오대학에서 공부하고 성직자가 되어(1858년) 퀼른의 신학교 교의학 및 도덕신학 교수로 있었다(1860-1888년). 최초의 저서 ≪Natur und gnade≫(1861) 및 ≪Die Herrlichkeit der gottlichen Gnade≫(1863)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참여로서의 초자연적인 것을 해명하였고, ≪그리스도교의 비의(秘義)≫(Mysterien des Christentums, 1865)에서는 삼위일체의 비의를 중심으로 하는 초자연적 세계란 형태로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구조를 밝히려고 하였다. 바티칸공의회(1869 1870년)에서는 교황 무류설을 열심히 주장, 반대자인 될링거(J.J.I. Dollinger)와 논쟁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 ≪가톨릭 교리학 교본≫(Handbuch der katholischen Dogmatik, 4권, 1873~1903)은 토마스주의의 원리에 입각하면서, 교부(敎父) 및 근대 신학자들의 저서를 많이 인용한 것이다. 그는 당시 유력했던 합리주의 및 자연주의적 경향에 대해 초자연적 신앙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 역설한 것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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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투아진타 [라] Septuaginta [영] Septuagint [관련] 칠십인역

고대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70인 역본. 셉투아진타란 70이란 뜻을 라틴어(Septuaginta)에서 따온 말이며, 이는 히브리어 모세오경을 유태인 학자 70명이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는 전설(아리스테아의 편지)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70인의 번역본인 셉투아진타에는 구약성서 중 모세오경 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다른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뿐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씌어진 성서도 수록되어 있다. (⇒) 칠십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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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치아니즘 [라] Seleucianismus

3세기에 갈라티아에서 번성했던 그노시스주의의 일파. 셀레우고스주의라고도 한다. 이것은 완성되지 않은 이원론(二原論)으로, 하느님과 물질은 다 같이 영원하며, 하느님은 죄의 작자(作者)이며, 인간의 영혼은 천사에 의해 물질적 요소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현세(現世)가 지옥이며, 부활은 자녀의 출생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셀레우치아니즘의 사고방식은 악의 문제를 창조된 세계에서의 의식적 악의와 떼어놓고 설명하려고 하는 여러 이단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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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본당 [한] 世宗路本堂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명동본당을 모본당으로 하여 1945년 8.15광복 직후 교구장의 승인을 얻어 사직동의 한 교우댁 2층에서 사직동본당으로 출발하였다. 사제수의 부족으로 주임신부의 임명도 없이 교구청에서 신부들이 윤번제로 와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1946년 4월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947년에는 첫 영세자 46명을 배출하였다. 1949년에는 도렴동(都 洞) 한옥으로 옮기면서 본당명칭도 도렴동 본당으로 바뀌었다. 1950년 6.25동란으로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9.28수복으로 2대 주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 명칭을 세종로본당으로 개칭하고, 1954년 지금의 성당 자리인 필운동(弼雲洞)에 대지 416평을 사들여 미군이 쓰던 퀜세트를 얻어다가 성당으로 활용하였다. 같은 해에 3대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가 부임, 1955년 8월 구성당을 신축 준공하였다. 박 신부는 교우들이 모은 성금으로 1958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영복산(榮福山) 6만 4,000평 을 매입, 본당묘지를 마련하고, 신심단체의 창설과 활동을 본궤도에 올려놓았으며, 많은 지성인을 집단 영세시키는 등 세종로본당을 굳건한 반석위에 자리 잡아놓은 뒤 1967년 미아리본당 신부로 전임하였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는 박 신부 때 지은 단층벽돌 성당이 신자의 증가로 비좁아지자 1968년 2층으로 증축, 위층은 성당으로 아래층은 유치원, 주일학교, 각 단체 회의실 등으로 이용케 하였다. 6대 본당주임 김인성(金仁成, 요한 비안네) 신부는 1979년 증축한 지 10년이 지나 초라해지고 각 단체 활동에 불편을 주게 된 성당을 전면 개수하였다. 1981년에 부임한 현 7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토) 신부는 현대식 사제관(수녀원과 각종 회의실을 겸함)을 신축하였다. 이 본당 관할구역은 내수동, 적선동, 당주동, 내자동, 도렴동, 광화문, 신문로 1, 2가, 필운동, 채부동, 옥인동,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신교동 등 일원이며, 신자수는 4,202명(1983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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