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한] 星湖僿說

조선 영조(英祖) 때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평생 동안 독서하면서 비망록(備忘錄) 형식의 단문으로 적은 글을 전집으로 펴낸 책. 30권 30책으로 되어 있다. 천지문(天地門) 3권, 경사문(經史門) 10권, 인사문(人事門) 11권, 만물문(萬物門) 3권, 시문문(詩文門) 3권의 5문(門)으로 분류하여, 정확한 고증을 곁들여 각 분야에 걸친 논문과 시문 등을 자신의 논평과 함께 수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이익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근세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익의 이 책의 권5에서 마태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한 발문(跋文)을 썼는데. 천주학은 오로지 천주를 존숭하는데, 천주라 함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이다. 그러나 그 존숭하는 방법은 불씨(佛氏)의 석가와 같다.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면서 오히려 같이 환망(幻妄)으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권10에서는 판토하(Pantoja, 1571-1618)의 저서인 ≪칠극≫(七克)을 비판하면서, 칠극이란 유교의 극기설(克己說)로서, 칠극의 ‘七’자는 곧 유가의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기(己)를 풀이 한 각주(脚註)인 것이요, 유학경전 중에는 교(驕), 인(吝), 식(食), 색(色), 탐(貪), 분(忿) 같은 것을 말한 대목이 여기저기 많거니와, 이것이 모두 칠극의 뜻이라고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하여도 왕성한 지식들을 가지고 여러 문제에 관해 자기 식견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이익은 그의 편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서양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하여는 비판도 많이 하여, 천주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가 비슷하다고 보았다. ≪성호사설≫은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이 후에 이를 다시 10권 10책으로 개편하여 ≪성호사설유선≫(聖號僿說類選)이라는 제하(題下)에 편찬하였는데 ≪성호사설≫의 문(門)을 편(篇)으로 고치고, 각 편을 문으로 나누었다. 즉 천지편(天地篇)을 천문, 지리, 귀신(鬼神)의 각 문으로 나누었고, 인사편(人事篇)은 인사(人事), 논학(論學), 논례(論禮), 친속(親屬), 군신(君臣), 치도(治道), 복식(服食), 기용(器用), 기예(技藝)의 각 문으로, 경사편(經史篇)은 경서(經書), 논사(論史), 성현(聖賢), 이단(異端)의 각 문으로 나누었으며, 시문편(詩文篇)은 논문, 논시(論詩)의 각 문으로 나누어 편집하고, 편자 자신의 주해(註解)까지 덧붙였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호경 [한] 聖號經

십자성호(十字聖號)를 그으면서 외는 가장 짧으나 가장 중요한 기도문. 모든 기도의 시작과 마침. 모든 일 전후에 이 성호경을 바치는 것은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신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고 계신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호경을 한 번 바칠 때에 부분대사(部分大赦)를 받을 수 있게 했으며, 특히 사제가 축성한 성수(聖水)를 손끝에 찍어 성호경을 바치면 더 많은 은사(恩赦)를 받는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호 [한] 聖號 [라] signum Crucis [영] sign of the Cross [관련] 성호경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타내는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으로, 십자(十字) 모양을 긋는 것. 이는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삼위일체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자임을 알리는 표시가 된다. 성호는 초기 사도시대 이래로 교회에서 성세성사(聖洗聖事)와 견진성사(堅振聖事), 축복(祝福)과 축성(祝聖) 등 전례를 거행할 때와 신자들이 사사로이 기도할 때 사용되었으며,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성당에 들어가거나 방에 들어갈 때, 식사 전후에, 위험과 유혹이 있을 때 등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을 성스럽게 할 때 사용되었다.

성호에는 ‘작은 십자성호’와 ‘큰 십자성호’가 있는데, 작은 십자성호는 사도시대에 이마에 엄지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던 것으로 4세기 이후로는 이마, 입술, 가슴에 작은 성호를 긋기 시작하여 지금도 미사 중에 복음을 듣기 전에 이 작은 성호를 긋는다. 이외에도 성세성사 또는 기타 강복(降福), 축성식의 경우에는 손으로 간단히 작은 십자성호를 긋는다. 큰 십자성호는 가장 많이 쓰이는 것으로 11세기경부터 교회에서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왼손을 먼저 가슴에 붙이고 오른 손가락을 모두 펴 한데 모아 성호경(聖號經)과 함께 이마에서 “성부와”, 가슴에서 “성자와”, 왼편 어깨에서 “성”, 오른편 어깨에서 “령의” 하여 십자를 이룬 후, 오른손과 왼손을 가슴에 합장(合掌)하여 붙이면서 “이름으로, 아멘” 하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왼손 엄지손가락 위에 십자형을 이루어 겹쳐 놓는다. (⇒) 성호경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혈 [한] 聖血 [라] Sanguis Pretiosissimus [영] Precious Blood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요한 6:54-56 참조).

성혈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특히 교황 글레멘스(Clemens) 6세(재위 : 1342-1352)는 그리스도의 피는 성자와 함께 결합되어 있기에 너무나 귀중하여 단 한 방울의 피로써도 모든 인류의 속죄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1849년, 교황 비오(Pius) 9세는 7월의 첫 일요일을 성혈 축일로 지정하여 모든 교회가 지키도록 했으며, 1914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는 축일을 7월 1일로 변경시켰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성혈 축일을 성체 축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즉 삼위일체 주일 후의 첫 목요일이나 첫 일요일은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이름으로 기념한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해 [한] 聖骸 [라] reliquiae [영] sacred relics

성인(聖人)의 유해(遺骸). 성해는 교회의 허가가 있은 후 공경(恭敬)의 대상이 된다. 유해를 소중히 모시는 일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불교가 그 한 예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성해를 공경하는 이유는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는 성인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였었고(게나디우스), 성신(聖神)의 궁전이었으며(성 아우구스티노), 고통을 받아 순교한 거룩한 몸으로(성 예로니모),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로 불림을 받을 육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은 성인들의 유해 혹은 유물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많은 은혜를 내리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는 사도 바울로의 몸에 닿았던 수건이 치유의 기적을 불러일으켰던 일(사도 19:12)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구약에서도 엘리야의 옷과 엘리사의 뼈를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었다(2열왕 2:14, 13:21).

성해 공경의 가장 오래된 실례는 156년 경 스미르나(Smyrna)의 주민이 성 폴리카르포(Polycarpo)의 죽음에 관하여 쓴 편지(Martyrium Polycarpi)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편지에서 그는 성인의 유해가 대단히 귀중하게 다루어져 안치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성해 공경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급격히 전파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1084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해 공경이 정식으로 인가되었으며, 성인의 유해를 옮겨가거나 분할하여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에서는 성해 공경이 초기 교회의 카타콤바와 깊은 연관을 맺는데 4세기부터는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성해를 옮겨가거나 분할하여 안치하는 것은 금지되다가 7-8세기에 이르러 허용되었다. 787년,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모든 교회가 반드시 성해를 모신 뒤 축성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성해 공경은 박해시대 이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교도들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미신적인 것으로 흘러 교회 안에서 한때 이 공경을 반대하는 움직임(비질란시우스)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와 같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그 신학적 토대를 확립하여 이 공경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증을 받았다. 교회법에 의하면, 추기경 혹은 주교의 인가를 받지 않은 성해 공경과 성해를 사고 파는 일은 금지된다. 성해는 성당 안의 성해 안치함이나 제대의 성석 안에 안치된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