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 [한] 聖餐式 [라] ritus Communionis [영] Communion rite

성찬의 전례에 있어서 성부께 제물로서 제헌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빵과 술의 형상으로 나누어 먹고 마시는 의식. 미사 성제의 순서로는 ‘주의 기도’에서 ‘영성체후 기도’까지의 부분이며, 옛 말로 제찬봉령(祭粲奉領)이라 불린 것이다.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은 하느님 한 분에게만 속하는 것이고 그 제물이 올려진 제단 역시 하느님의 것이지만, 성찬식은 제사를 받으신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잔치상에 초대하시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와 인간의 성화(聖化)도 하느님의 거룩하심에서 얻는 것이고 내세에서 인간이 누릴 영화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더욱이 하느님의 잔치상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같은 잔치에 참여하는 형제들과의 일치 또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류가 바친 제물은 다시 인류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된다는 것이고. 이 선물은 바로 인류의 구원이고 하느님과의 일치이며 같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의 일치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로 인한 당신과 그리스도교인 상호의 내재성(內在性)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샅 것이다”(요한 6:56-57).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찬기도 [한] 聖餐祈禱 [라] preces Eucharisticae [영] Eucharistic prayers [관련] 로마 미사전문

성찬의 전례에 핵심이 되는 것으로 감사송부터 끝영광송(final doxology)까지의 부분. 그 주요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회상하고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며(감사송), 구속으로 인하여 온 누리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우리의 왕이요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거룩하시다), 거룩한 변화를 위하여 성신께 청원하며(Epiclesis) 면병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고(거룩한 변화),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을 기념하며(Anamnesis) 제물이 되신 성체와 성혈을 성부께 봉헌하고(봉헌),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성인들의 전구(轉求)를 구하며(전구), 성삼위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끝영광송) 등이다. 오늘날 성찬기도는 네 종류를 두어 선택해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거룩한 변화의 말씀만은 통일되어 있다. 그 선택 기준에 따르면 제1 성찬기도는 언제나 사용할 수 있으나 특히 주일과 그 성찬기도에 이름이 나오는 사도들과 성인들의 축일에 사용하고. 제2 성찬기도는 주간 평일과 특수한 경우(어린이 미사)에 사용하며, 제3 성찬기도는 특히 주일과 축일에 그에 맞는 감사송과 함께 사용하며, 제4 성찬기도는 감사송이 불변이므로 고유 감사송이 없는 날 사용할 수 있다. (⇒) 로마 미사전문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직주교위원회 [한] 聖職主敎委員會 [영] Commission for Clergy and Religious [관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천주교중앙 협의회(C.C.K.)산하 상설 주교위원회 가운데 하나. 그전까지는 분과위원회제로 운영되었으나 1981년 10월 14일 주교회의의 결의에 따라 주교위원회제로 개편되었다. 구성은 6명의 주교와 1명의 총무신부로 이뤄지며, 필요에 따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이뤄지는 전문위원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다. 성직자, 수도자, 선교단체, 군종단 등의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연구 심의하며, 이주사목위원회, 군종단, 외방선교회 등 단체를 지도 감독한다.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직자환속 [한] 聖職者還俗 [라] reductio clericorum ad statum laicalem

성직자가 평신도 신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성직자 환속이라 한다. 성직자 환속은 성직박탈(聖職剝奪, degradatio)이나 독신제에 대한 관면을 얻은 후의 혼인, 용병지원(傭兵志願), 수도회 탈퇴 등의 이유로 성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취해진다. 환속처분을 받은 성직자는 이제까지 누려왔던 직위, 성직록, 성직자로서 가지는 특권 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서품은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환속한 성직자가 서품권을 행사할 경우, 재치권에 해당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유효하다. 그러나 이 행위가 유효하다고 하여 합법적인 행위는 아니고 불법적인 것이다. 환속된 성직자가 다시 성직으로 복귀할 경우에는 반드시 교황의 허가를 받아야하며, 이 때 또다시 서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성직자영입운동 [한] 聖職者迎入運動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李檗) 등에 세례를 주고 명례방(明禮坊)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써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 후 이벽 · 이승훈 등 교회 중심인물들은 1786년에 성직조직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교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 가성직단을 조직하였다. 가성직단은 그 후 2년 동안 성무를 집행하면서 교회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곧 이와 같은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난 비합법적인 교계제라는 이론(異論)이 제기되어, 이에 대한 지도와 재결을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북경주교는 평신도는 성세성사를 집전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혀, 가성직제도의 불가함을 알려 왔다. 이에 정식으로 교회예식에 맞는 성사 받기를 원한 조선 교회에서는 1790년 여름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였다. 이 같은 요청을 받은 구베아(Gouvea) 주교는 곧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는 한편, 이 같은 사실을 교황 비오 6세에 전하였으므로 179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도 조선 교회의 탄생을 알게 되었다.

1791년 2월, 북경주교는 조선 교회와의 약속에 따라 마카오에서 자라난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보냈으나, 이 때 조선 교회에서는 조상제사 문제로 박해가 일어났으므로 약속대로 변문(邊門)에 그를 맞으러 갈 수가 없어서, 신부 영입은 허사가 되고 레메디오스 신부는 북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조선 교회에서는 1793년에 다시금 윤유일, 지황(池璜)을 북경에 보내 주교를 만나보게 하였다. 조선 교회의 이 같은 거듭된 요청을 받고,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춘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주문모 신부는 그 해 12월 말 국경을 넘어 무사히 서울에 잠입할 수 있었으므로 조선 교회는 비로소 목자를 갖게 되었다. 향후 7년간 그는 숨어서 힘쓰니, 조선 교회는 날로 발전해갔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주문모 신부마저 잡혀 순교하였으므로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를 잃은 조선 교회는 빈사상태에서 서서히 회복되어 1811년부터 권기인(權, 요한), 신태보(申太甫), 이여진 등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다시금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1811년에 권기인 등은 북경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를 다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 따로 교황에게도 조선 교회의 당면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따뜻한 동정 있기를 간청하는 서한을 보냈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이 같은 노력과 소원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1816년경부터는 정하상(丁夏祥)으로 성직자 영입운동이 이어진다. 정하상은 전후 15년 동안 9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면서 북경주교에게 직접 성직자 파견을 호소하였고,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보자 유진길(劉進吉) 등과 상의하여 천주교회의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직접 청원키 위해 1825년 유진길이 한문으로 쓴 청원서를 발송하게 되었다. 이 서한에서 그들은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조선 교회에 대한 영속적인 대책을 강구해 줄 것을 아울러 요청하였다.

조선 교회의 이상과 같은 끊임없는 성직자 파견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경 교회가 성직자를 파견 못한 원인은, 때마침 북경 교회도 박해를 받아 성직자 부족으로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할 만한 여력이 없었는데 있었고, 한편 로마 교황청은 조선 교회로부터 여러 번의 간절한 청원을 접했으면서도, 프랑스대혁명의 여파와 포르투갈 보호권에 기인하는 포교상의 관할권 문제 등의 해결이 늦어져 조선 교회를 위한 조속한 대책을 강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831년에 이르러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회의 이같은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고, 조선 교회를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여, 그 포교사업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를 임명하고, 그의 조선 입국에 앞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먼저 입국케 하였고, 곧 이어 1836년 모방(Maubant) 신부가 입국하고 1837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와 앵베르(Imbert) 주교가 연달아 입국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52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어, 교회 창설이래 끊임없이 추진되어온 성직자 영입운동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