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 기타 전례에 사용되는 용기(容器)들을 통틀어 말한다. 성작(聖爵)과 성반(聖盤), 성합(聖盒), 성광(聖光)처럼 성체와 성혈이 직접 닿게 되는 것도 있으며 그 밖에도 성체포(聖體布), 성작수건(聖爵手巾), 성작개(聖爵蓋), 주수병(酒水甁), 향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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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기타 전례에 사용되는 용기(容器)들을 통틀어 말한다. 성작(聖爵)과 성반(聖盤), 성합(聖盒), 성광(聖光)처럼 성체와 성혈이 직접 닿게 되는 것도 있으며 그 밖에도 성체포(聖體布), 성작수건(聖爵手巾), 성작개(聖爵蓋), 주수병(酒水甁), 향로 등이 있다.
탁발수도회(제1회) 창설자인 정신에 따라 생긴 여자수도회. 그 예로서 프란치스코회의 글라라회(Poor Clares), 도미니코회의 도미니코 여자수도회(Dominican Sisters) 등이 있다. (⇒) 수도생활
정화경(1807∼1840).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안드레아.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가정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수계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면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공소를 세웠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93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예비시키는 한편 피신해 온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를 맞아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주교를 찾고 있는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고, 또다시 신부들을 잡으려고 김순성 일당이 계교를 꾸미자 이를 눈치채고 피신한 후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9월에 체포되어 포청에서 고문과 형벌을 이겨낸 후 19840년 1월 23일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정해성(1943∼1984). 수원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토마스 아퀴나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중원리(中元里)에서 태어났다. 성신중고등학교를 거쳐 1970년 7월 11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고, 경기도 안중(安仲)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목생활을 시작하였다. 1972년 5월 군종신부로 육군에 입대, 1977년 12월 대위로 예편한 후 경기도 왕림(旺林)본당 주임신부 겸 광성국민학교 교장으로 사목하였다. 1983년 4월 수원 가톨릭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자 사무국장 겸 건설본부장에 임명되어 수원 가톨릭대학 건립을 지휘하는 한편 수원교구 건축위원, 광암학원 이사, 수원교구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84년 2월 수원 가톨릭대학을 완공 후 동(同)대학의 기획관리처장 겸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84년 10월 24일 간암으로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선종, 미리내 소재 수원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1827년(丁亥年) 전라도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乙亥)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정하상(丁夏祥)을 주임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6년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6명의 천주교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 관헌들의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정해박해는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申太甫)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의 단양(丹陽)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忠州)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 이일언(李日彦) · 정태봉(鄭太奉)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 김사건(金思建) · 김언우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명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