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한] 張勃

장발(1901∼2001). 서양화가, 한국의 성화(聖畵) 개척자. 세례명 루도비코, 호는 우석(雨石). 인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이다가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9년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지도한 고려화회(高麗畵會)에서 양화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그때 양화가가 될 뜻을 굳혀 1920년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다음 컬럼비아 대학 미술과에 입학, 1925년에 졸업하였다. 당초부터 그는 성화를 그릴 목적으로 있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김대건 신부>[유화 반신상, 천주교 서울 대교구 소장]는 현존하는 그의 가장 초기의 성화이다. 그 후 그는 서신을 통해 독일 뮌헨의 그리스도 미술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그 협회의 기관지인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che kunst)을 구독하여 독일의 엄격한 보이론파(Beuron)의 성미술 정신에 감화를 받았다.

1925년 7월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거행된 79명의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 전에 형제인 장면(張勉)과 더불어 치명복자(致命福者) 친족대표로 미국에서 직행하여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명동성당의 대작인 <14종도상(宗徒像)>을 위촉받고 그렸다. 같은 시기에 주위의 요청으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소장)도 그렸다.

그 수법은 전형적인 보이론풍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널리 알려져 있는 1928∼1929년 무렵 제작한 <복자 김대건 신부상>(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은 다분히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와 한결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프랑스 나빌파(Nabis) 화가 드니(M. Denis)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장발은 여러 성당에서 거듭 성화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때의 작품 중 신의주성당 벽화 <성령강림>(聖靈降臨, 1928), 평안북도 비현(批峴)성당의 <예수 성심상(聖心像)>(1935),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1945)는 그의 대표적인 역작이었으나 광복 후의 국토분단과 북한지역의 공산화 및 6.25 전쟁의 참화 때문에 <성모영보>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앞에 든 성화 외에도 평양 서포(西浦)의 성모(聖母)수녀회의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1940년 무렵)과 서울 가르멜 성당의 <성모대관>(1945) 제작사실이 있으나 역시 기록뿐이다. 다만 1941년에 그린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소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하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보존돼 있다.

광복 후, 장발은 서울대학교 미술과 창설을 주도하고 1961년까지 초대 미술대학장을 역임하는 한편 국전(國展)심사위원, 한국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회원이 되었다. 1961년 장면 정권의 이탈리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5.16혁명으로 부임을 못한 채 해임되고,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 세인트 빈센트 대학 명예 교수를 지냈다. 1976년에는 미국에서 그린 추상화 작품들을 서울에 보내 전시를 가졌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가톨릭미술 특별전에 출품했고, 1925년의 김대건 신부를 위시한 역사적 한국 순교자 시성식에 로마 시복식 참례 생존자로서 직접 참석하였다. 여러 공로로 서울특별시 문화상(1949년), 예술원상(미술공로상, 1958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금관, 1984년)을 받았다.

[참고문헌] 張勃, 朝鮮カトリツク藝術, カトリツク大辭典, 東京 富士房, 1940 / 世界文藝大辭典, 上·下, 成文閣, 1975 / 李龜烈, 韓國가톨릭美術 2백년의 궤적, 季刊美術, 29호, 1984.

[참고 : 장발은 2001년 5월 10일부터 뉴욕 한국 문화원 갤러리에서 열리는 100수 기념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4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100번째 생일을 지내고 선종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장면 [한] 張勉

장면(1899∼1966). 정치가, 교육자. 본관은 인동(仁同), 호(號)는 운석(雲石), 세례명은 요한. 서울 적선동에서 구한말(舊韓末) 부산 세관장을 지낸 장기빈(張箕彬)의 아들로 출생,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도미(渡美), 1925년 맨하턴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한 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79위 복자 시복식에 한국평신도대표로 참석하고 귀국, 평양교구에서 교회일을 보며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3년 정지용(鄭芝溶), 이동구(李東九), 한기근(韓基根) 신부 등과 <가톨릭청년>을 창간하였고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다. 8.15광복 후 정계(政界)에 투신, 민주의원의원(民主議院議員),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해 제3차 파리 유엔총회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아내고,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한 뒤, 미국 맨하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 1950년 영국 포덤(Fordham)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6.25동란이 일어나자 기민한 외교적 수완으로 유엔의 참전을 얻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고 교황청으로부터 교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훈장을 수여 받았다. 1952년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하여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7년 미국 시튼홀(Seton Hall) 대학에서 다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이듬해 조병옥(趙炳玉)과 러닝메이트로 입후보했으나 낙선되었다가 4.19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집권 9개월 만에 5.16군사쿠테타로 실각, 그 뒤 5.16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 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뒤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미 청년시절부터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정회원(正會員)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정치 일선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지식인들을 전교 입교케 하였는데 5.16군사쿠테타 이후는 소속본당인 혜화동본당의 평의회회장, 운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보며 교리를 가르쳤다.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영한교회용어집≫(英韓敎會用語集,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 1929), ≪구도자의 길≫(1930), ≪교부들의 신앙≫(譯書, 1944), ≪현대성녀 젬마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등과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썩지 않고는≫ 등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장림절 [한] 將臨節 [관련] 대림절

대림절의 옛말. ⇒ 대림절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장림 [한] 將臨 [관련] 대림절

‘대림’(待臨)의 옛말. ‘장차 오심’을 뜻하는 장림이 ‘오심을 기다림’이란 뜻의 대림으로 표현이 바뀐 것이다. ⇒ 대림절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장로교 [한] 長老敎 [영] Presbyterianism

교회 정치제도로서는 장로(長老)들에 의한 교회의 정체(政體)를 지칭하는 말이다. 16세기 스위스계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이 교회제도가 설립될 때에는 사도적 전통의 계승과 그 개혁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신약성서 안에 있는 교회정치의 모델은 장로제도와 함께 감독 및 회중(會衆)제도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시인하고 있으며, 장로제도만이 신적인 제도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장로교회 정치는 피라미드형의 교회 교권과 치리(治理)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당회(堂會) · 시찰회(視察會) · 노회(老會) · 대회(大會), 그리고 총회(總會)가 그것이다. 그런데 구미(歐美)의 교회에서는 시찰회가 없는 곳이 많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회가 없다. 총회는 각 노회를 대표하는, 대개 같은 수의 목사, 장로 총대(總代)로서 구성되는 교회 최고의 치리 기관이다. 이러한 여러 치리 기관들은 본래 교회원들의 선거에 의한 대의(代議)형태의 피라밋식 행정체제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신약성서의 장로(presbyters)와 오늘의 장로(elders)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 성격에 대한 이견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 양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목사가 실질상의 장로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사도적 계승을 이 장로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수행하는 데 중요성을 두고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목사들은 한 교회의 공동의회(共同議會)에서 선거되어 초빙되지만, 목사의 안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총회에서 시행한다. 장로교 목사의 교육 수준은 전통적으로 높아서, 대개 4년제 대학을 마치고 3년의 신학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장로교로서 국교(國敎)를 삼은 나라는 스코틀랜드밖에 없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도 장로교회의 기본원리인 정신적 영적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또 실현하고 있다. 장로교의 신앙 표준은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교리문답≫(敎理問答) 및 신경(信經)이지만, 최고의 표준은 역시 하느님의 말씀, 성서에 두고 있다. 그리고 성서는 ‘정확무오’(正確無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교리는 근원적으로는 칼빈주의적이요, 예정론(豫定論)과 신의 영광에 핵심을 두고 있다. 예배는 간결하고 예식을 중요시하지 않으나, 위험을 차리고 있다. 물론 장로교에도 고교회(高敎會)와 저교회(低敎會)가 있어서 의식에 치중하는 곳도 있고, 또 이를 전혀 무시하는 곳도 있지만, 칼빈(J. Calvin, 1509∼1564)이나 녹스(J. Knox, 1513∼1572)의 원칙에 충실했을 때, 언제나 설교에 대한 강조, 사도 신경에 대한 충실을 그 특징으로 나타내게 된다. 장로교의 본래 전통에서 성찬 예식은 빈번히 지켜지도록 돼 있어서, 설교와 성찬으로 교회의 두 기둥을 삼고 있다. 당회에 의한 치리나 권징 역시 한 때 엄격하게 공식적으로 준행되었으나, 근래에는 그리 현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다만 목사에게 그 권한이 대폭 이양된 느낌이다. 전 세계의 장로교회 연합체인 ‘세계개혁 장로교회 연맹’(The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holding Presbyterian System)은 1875년에 조직된 이래, 정기적으로 회집되고 있으며, 한국의 노정현(盧貞鉉) 장로가 1978년부터 그 부회장(副會長)을 1983년 현재까지 맡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실질상 1876년에 그 초석이 놓여졌다. 그 해 만주의 고려문(高麗門)에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 선교사 매킨타이어(J. MacIntyre)에게서 이응찬(李應贊)이 세례를 받고, 곧 성서번역에 착수하였기 때문이다. 선교 역사는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安連, 1858∼1932)이 인천에 도착한 날로부터 기산한다. 그의 뒤를 이어 1885년 4월에 언더우드(H.G. Underwood, 1859∼1916)가 다시 착한(着韓)하여 선교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선교 확장이란 단계를 지나 장로교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소위 ‘네비우스 방법’이란 선교 원칙을 적용할 때부터의 일이다. 그것은 선교지에서의 이반적인 복음전파의 효율화를 노린 방법 이외에, 자립 선교, 자립 정책, 자립 수급의 세 원칙을 철저하게 실현함으로써 장로교 정치의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나간 정책 결정이었다. 장로교의 이러한 자립적 주체적 신학의 정립과정은 그 때 다른 교파들과의 선교지역에 대한 교계예양(敎界禮讓, comity arrangement)이란 절차에서도 나타났다. 교계예양을 통해서 장로교는 대개 평안남북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및 전라도의 대부분을 맡았지만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미 호주 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의 분담 형태였다. 이런 여러 장로교 선교부들의 협력과 협의를 위해서 1889년에는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호주) 미션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고, 1893년에는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서 장로교의 신경과 장로교회의 조직을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장로교가 독로회(獨老會) 형식으로 조직된 것은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안수를 받는 1907년 9월 17일을 기해서이다. 이 때 네 장로교 선교부은 한국에서 단일 장로교회 설립에 합의하여, 그 통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초대 독로회장에는 선교사 모페트(S.A. Moffett, 1864∼1939)가 선출되었다. 독로회 창립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 7명, 장로 33명, 학습교인이 2만 1,482명, 원입(願入)교인이 6만9,098명, 세례교인이 1만 7,890명이었다. 교회수는 1,022개소, 학교수는 402개교였다. 이 교회들이 1906년에 낸 헌금 총액은 9만 4,227원($47,113)이었다. 이 때 장로교회는 1905년부터 진행된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의 여파로 ‘1907년 평양(平壤)의 대부흥’이란 일대 전환기를 겪고 있었다. 강력한 투쟁적 · 구약적(舊約的) · 민주주의적 동력 동원체제로서의 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해서 초월적인, 종교적 동기가 구조적으로 작용하는 교회로의 혁신운동이 실현된 것이 바로 이 평양 대부흥이었다. 그 여파는 감리교회를 비롯, 전국 교회 도처에 미치고 있었다.

1912년에 이르러서 장로교회는 총회로 발족하게 되었다. 9월 1일 평양에서 창립된 총회에는 총대목사, 장로, 선교사 등 221명이 참석하였다. 이 때 언더우드가 총회장에 선출되고, 회계직(會計織職)의 블레어(W.N. Blair) 이외의 모든 임원직은 한국인 총대가 맡았다. 이 총회는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의 교회임을 과시하였다. 총회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내양(萊陽)에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실상 1909년 이미 한국 장로교회는 시베리아에 최관흘(崔寬屹)을 파송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교회는 계속해서 간도(間島), 몽고(蒙古), 멕시코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인도의 기아(飢餓)에 막대한 구제헌금을 보낸 일도 있었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의료 선교와 학교 교육에서도 현저하게 공헌을 남겼다. 1885년 4월에 벌써 알렌은 서울에 고종(高宗)의 윤허로 광혜원(廣惠院)[뒤의 濟衆院, 世富蘭偲, 延世大學校醫科大學]을 설립한 일이 있고, 평양에 기홀(記-)병원, 부산 · 대구 · 여수의 나병원, 세브란스의 결핵병원 등을 설립하여 신체의 병고에서의 해방도 복음전파와 함께 수행해 나갔다. 더구나 경신학교(儆新學校, 1886년), 정신학교(貞信學校, 1887년), 숭실학교(崇實學校, 1897년)와 평양신학교(1901년)를 설립하여 교육에 정진하였다. 1909년 현재 장로교계 학교수는 605개교, 학생수 1만 4,708명에 이르고 있었다. 일제도 한국의 근대 교육의 시작이 장로교 · 감리교에 의해서 주도 된 사실을 그들 경무부장(警務部長) 회의(1910년)에서 공언한바 있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치하(1910∼1945년)에서 그 신앙의 보존과 민족적 동일성의 확보를 위해서, 때로는 민족 양심의 보루로서 괄목할 만한 흔적을 남겼다. ‘105인 사건’은 서북(西北)계의 장로교 박멸을 위한 일제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날조였고, 105인 실형자중 97명이 장로교인이요, 그 중 67명이 선천(宣川)과 정주(定州) 출신이었다. 이것은 장로교인이 지탱하여온 민족적 정기에 대한 일제의 박멸 자세였고 따라서 장로교회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배경을 설명하여 준다.

3.1운동 때에도 그 피해 비율이 장로교의 경우가 훨씬 크게 눈에 띄었다. 총독부가 발표한 기소피고인의 종교별(宗敎別) 통계는 별표(別表)와 같았다.

그런데 개신교의 2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1925년 현재의 교세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장로교 : 교회수(2,309), 목사수(315), 전도인수(779), 교인수(193,823), 주일학교수(4,663)

감리교 : 교회수(1,140), 목사수(145), 전도인수(631), 교인수(45,166), 주일학교수(946)

합계 : 교회수(3,449), 목사수(460), 전도인수(1,410), 교인수(261,580), 주일학교수(5,609)

평균치를 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수적 비율은 크게 3대 1정도였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고, 이러한 장로교의 수적 우위가 한 때 장로교가 그 교권적 기능을 감리교에 대하여 행사한 것처럼 보이는 오해를 낳게도 하였고, 실상 1930년대 중반에는 피차간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가령 1932년 6월에 발족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이란 것이 그 구체적인 한 표현이었다. 감리교의 신흥우(申興雨)와 서울의 일부 장로교 목사들[咸台永, 權英湜, 全弼渟 등]이 동조하였던 이 토착적 민족교회 지향의 한 종파운동이 서북의 장로교 대세와 그 교권기능에 도전한 하나의 반발운동이었다. 실상 이 때까지 장로교회 안에도 대구(大邱)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 봉산(鳳山) 김장호(金壯鎬)의 기독교회, 차학연(車學淵)의 자유교회와 같은 종파운동이 있었다.

교회는 1920년대부터 사회사조의 변화나 농촌의 몰락이란 현실에 직면하여, 사회 개혁적 사회운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총회 안에 농촌부를 상치(常置)한다든가, 전국적인 규모의 농사강습소를 사경반(査經班)이란 전통적인 교회훈련 채널을 통하여 수행하며, 소작인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협동조합 운동도 진행하였다. 더구나 일제의 민족도덕 해체작용, 곧 유곽이나 아편 판매, 주초(酒草) 소비에 대하여 절제(節制)운동 차원 이상의 사회정의 운동을 수행하였고, 1936년에는 ‘연소자 금주금연법’을 칙령으로 발효케 하는 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각해져서 교회관계 여러 운동이 피검(被檢) 시찰되고, 1938년에는 총회에서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 89명의 임석 아래 신사참배를 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총대의 항의도 있었지만 결국 신사참배를 신민(臣民)으로서의 적성(赤誠)으로 한다고, 모멸의 결의를 해야만 하였다. 이때부터 교회의 신성(神聖)은 위협받았다. 도처에서 전향의 성명이 발표되고, 교회당은 가마니 공장, 심지어 헌병 파견대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마지막 추방된 것은 1942년 6월의 일이었다. 선교자들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이외에도 많았다. 더러는 광복 이후에 출감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한국 교회의 양심으로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광복이 되고 나서 교회는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하지만 일제치하 때의 전향의 문제, 신앙 보수의 문제가 엇섞여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장로교도 1951년 고려파 장로교와 예수교 장로교의 분립이 있었고, 뒤이어 신학 방법론의 문제 때문에 역시 1953년 근대주의와 에큐메니즘 표방의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의 분립, 그리고 W.C.C의 문제로 용공(容共)시비 때문에 통합(統合) 예수교 장로회와 합동(合同) 예장과의 분립이 1959년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1980년 현재 장로교 수는 29교단이고, 교인수는 대개 400만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1978년부터 이 여러 장로교의 재일치를 위한 협의회 내지 연맹 형식의 접근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기운은 1983년 미국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와의 일치에 자극받아 더 진지하게 추진되고 있다. (⇒) 프로테스탄티즘 (閔庚培)

[참고문헌] J. Moffett, The Presbyterian Church, 1928 / J.N. Ogilvie, The Presbyterian Churches, 1925 / E.W. Smith, The Creeds of Presbyterians, 1901 /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改訂版, 1982 / 白樂濬, 韓國改新敎史, 1974 / 張喜恨, 韓國長老敎會史, 1970 /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錄, 1912∼1983 / 各老會錄, 朝鮮예수敎聯合公議會錄, 1982∼1936 /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上, 1928; 下, 196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