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한] 長老 [영] presbyter

히브리어 zaken(늙다)에서 유래된 장로라는 말은 씨족 · 부족공동체 사회의 장(長), 혹은 연장자(年長者, elder)로 지도자의 역할과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1사무 16:4). 예컨대, 유대의 최고회의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Sanhedrin)은 장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출애 3:16). 가나안에 정착한 뒤부터 장로는 촌락의 지도자가 되었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는 전쟁의 지휘자, 재판관, 정치의 고문관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도 교회도 이 전통적인 장로제도를 도입하였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장로를 임명하여 지방교회들을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14:23). 초대 교회의 장로(presbyter)는 공동체의 연장자로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고, 주교에 의해 장로로 임명되었고, 장로회(presbystery)를 구성하여 주교를 도왔다. 장로는 주교로부터 위탁받아 일반 신자들을 가르치고,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세례를 주었다. 장로의 지위가 부제의 위, 주교의 아래였던 점으로 보아 사제(司祭)에 해당했던 지위라고 볼 수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장로를 사제단(presbyterate)으로부터 안수(按手)를 받고, 주교에 의해 서품된 주교나 사제를 가리킨다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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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미사 [한] 葬禮∼ [라] missa exsequialis

죽은 사람을 위해 바치는 미사. 보통 레귀엠(requiem)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개정되기 전의 라틴 전례 중 장례미사의 입당송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주여,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의 첫 단어 Requiem(안식을)에서 따 온 말이다. 장례미사에 사용되는 제의가 검은색이기 때문에 흑(黑)미사라고도 불려진다. 중세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현재는 4종류로 제한하였다. 즉 장례미사, 주년위령미사, 보통위령미사와 죽은 이를 위한 여러 가지 기도문의 4가지만이 있다. 장례미사 때에는 우선 시신을 운반하고 미사를 거행한다. 기쁨을 표하는 영광송(gloria), 신경(credo) 등은 부르지 않으며 복음의 말씀을 읽을 때도 따로 촛불을 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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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련본당 [한] 長連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서부리(黃海道 殷栗郡 長連面 西部里). 장련지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83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평안도 · 황해도 지방의 포교를 맡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와넬(Victor Poisnel, 朴道行) 신부였으며, 장련면 금복리(今卜里)에 첫 공소가 개설되었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선교사는 로(Jean Louis Rault, 盧若望) 신부였다. 1887년 입국하여 황해도 고정선교사로 임명, 장련을 포교의 거점으로 삼고 18개월 동안 50여명에게 성세를 주는 수확을 거두면서 구월산(九月山)주위에 4개의 교우촌을 형성시켰다.

그 뒤 장련지방은 안악(安岳)의 매화동(玫花洞)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고, 1914년 은율(殷栗)본당이 부활되자 장련지방은 이 본당 관할이 되어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이보환(李普煥, 요셉),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윤의병(尹義炳, 바오로)등 역대 신부들의 지도를 받았다. 장련지방은 1939년 본당으로 독립한 후에도 6년간(1942∼1948년) 신부 배정을 받지 못해 은율본당의 신부가 겸임으로 본당 사제 업무를 맡는 등 모본당인 은율성당과는 30여년간 형제적 공동체 관례를 유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장련지방 천주교회의 역사는 대부분 공소에서의 역사이며, 독립된 교회로서의 역사는 초대 주임사제 안학만(安學滿, 루가) 신부의 재임기간(1939∼1942년)과, 2대 주임사제 신윤철(申允鐵, 베드로)의 재임기간(1948∼1950년)을 합친 5년간에 불과하다. 1950년 6월 24일 밤, 6.25전쟁 개시와 함께 신윤철 신부는 장련 내무서로 강제 연행, 구금되었다가 은율본당의 윤의병 신부가 당한 것과 같이 큰 자루 속에 넣어져 해주 수양산(首陽山)으로 끌러가 살해당하였으며, 장련본당은 그 때부터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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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유 [한] 張德裕

장덕유(?∼1802).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1796년 김종교(金宗敎)에게 문교했고 평소 순교(殉敎)하기를 원하여 주문모(周文謨) 신부,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鐘)과 함께 박해가 일어나면 동생동사(同生同死)할 것을 약속하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청(捕廳)과 형조(刑曹)에서는 심한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주문모 신부, 정약종과 한 동생동사의 약속을 부인하였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용감히 신앙을 고백,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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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벌 [한] 將臺∼

장대(將臺)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으로,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사들을 명령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조선왕조시대 군영(軍營)에는 연병장 정면에 장대가 있었고 연병장에서는 군사들의 훈련 · 사열 · 열병 이외에 간혹 중죄인에 대한 사형 즉 군문효수(軍門梟首)가 집행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했던 많은 곳이 장대벌로 불리고 있는데, 울산(蔚山)과 동래(東萊)의 장대벌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순교지로 유명하다.

① 울산의 장대벌 : 병인(丙寅)박해를 피해 경주 근처의 진목정(眞木亭)에서 은거하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 김종륜(金宗倫, 루가) ·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등이 1868년 체포되어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이다. 현지명은 울산시 병영동 5번지이다. 울산의 장대벌에서 순교한 이들 세 명의 순교자들은 순교 직후 진목정에 안장되었다가 1932년 대구 감천리(甘泉里)의 교회묘지로 이장되었고 1973년 다시 대구 신천동 복자성당으로 이장되었다.

② 동래의 장대벌 : 병인박해를 피해 울산에서 은거하던 이정식(李廷植, 요한), 이관복(李寬福, 프란치스코, 이정식의 아들), 박소사(朴召史, 마리아, 이관복의 아내), 이삼근(李三根, 베드로, 이정식의 처남),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 이월주(李月柱), 차장득(車長得, 프란치스코), 옥소사(玉召史, 바르바라) 등이 1868년 체포되어 이해 8월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이다. 위치는 현재 부산시 남구 광안동의 육군 인쇄공장 자리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8명의 순교자들은 순교 직후 부산 명장동(鳴藏洞)의 야산에 안장되었고, 이들 중 차장득, 양재현, 이월주, 옥소사 등의 유해는 1972년 오륜대 순교자 묘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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