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도 [한] 李景陶

이경도(1780∼1801). 순교자. 세례명 가롤로. 이수광(李晬光)의 후예. 권철신(權哲身)의 생질이 되며,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의 오빠가 된다. 1791년 집안이 함께 입교하였다. 경녕군(敬寧君)이라는 칭호를 지닌 반열(班列)에 속한 집안이면서도 신앙이 매우 두터워, 1793년 그의 아버지 이윤하(李潤夏)의 상을 당하였을 때, 당시 상가(喪家)에서 관행(慣行)되는 일체의 미신행위를 금하였으므로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소신껏 신앙을 지켰다. 그 뒤 그는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곱추 행세를 하여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1801년 9월 11일(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어린 나이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그해 12월 26일(음) 22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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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한] 李甲秀

이갑수(1924∼2004). 주교. 제2대 부산(釜山) 교구장. 세례명 가브리엘. 본관은 영천(永川). 경북 대구에서 출생. 1938년 경북 영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에 입학, 동성상업학교 을조를 졸업하고 1944년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성신대학의 前身, 현 가톨릭대학]에 입학했고, 1950년 졸업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부산 범일동본당 보좌 신부로 2년 동안 사목하다가 195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4년 마케트(Marquette)대학을 졸업하고 포담(Fordham) 대학원에 진학, 1961년 동(同)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하여 대구교구장 비서 겸 학생지도 신부로 활동하는 한편 대구 효성여대 · 경북대 등에서 사회학을 강의하였다. 1966년 대구 선목중 · 고등학교장을 거쳐 1971년 부산교구 보좌신부로 임명되어 이해 8월 24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고, 1973년 마산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자 마산교구 관리주교가 되었다가 이어 1975년 교구장직을 계승하였다.

현재 부산교구장으로서 부산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그 밖에 주교회의 사회주교 위원회의 위원과 평신도 사도직 전국단체인 가톨릭 중 · 고등학교장회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이갑수 주교는 2004년 12월 21일 80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선종하였다. 현재 부산교구 제3대 교구장은 1999년 착좌한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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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난 [한] 李干蘭

이간난(1814∼1846).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결혼하여 3년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고 이 때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46년 5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자 포졸들의 수색을 피해 현석문(玄錫文) 회장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 현석문, 정철염(鄭鐵艶), 김임이(金任伊), 우술임(禹述任)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9월 20일 포청에서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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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환 [한] 李家煥

이가환(1742∼1801). 남인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외숙(外叔)이 된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儒學者)로, 이벽(李檗)이 수표교(水標橋)에서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슬프도다. 나도 일찍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을 보았는데 비록 그것이 명설(名說)이라 할지라도 정학(正學)은 아니다. 이벽이 그것을 우리의 도(道)와 바꾸려 하다니 어찌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토론으로 그를 설득코자 찾아갔다. 그러나 이벽의 이론에 굴복당하여 그는 오히려 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구해다 읽고 연구한 끝에 믿을 것을 결심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전교하고, 이벽,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과 늘 왕래하면서 교회일에 많은 협력을 하였으므로 반대파로부터 사교(邪敎)의 교주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입교 여부는 분명치 않고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반대파의 모함으로 천주교인으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된 후로는 천주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 뒤 관직이 승진되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나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어 여전히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러면서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 홍낙민(洪樂敏),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사학의 괴수라는 혐의로 투옥되어 그 해 4월 8일(음 2월 26일)에 60세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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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타리나 [한] 李∼

이 가타리나(1783∼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성녀 조 막달레나의 모친.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하였다. 14세 때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의 뜻에 따라 조(趙)씨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 3남매를 두었고 남편을 권면하여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게 되었다.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경하여 조 바르바라라는 교우의 집에 곁방살이 하던 중, 1839년 6월 큰 딸 조 막달레나, 그리고 주인집 세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딸과 함께 한차례의 주뢰형을 받고 별다른 형벌과 고문 없이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체포된 지 3개월 되던 9월의 어느 날 염병에 걸려 옥사(獄死)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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