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길 [한] 劉進吉

유진길(1791∼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일명 용심.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고 특히 종교적 철학적 문제인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여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인(世人)의 칭찬과는 달리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게 되어 교리를 터득한 후 곧 입교했고, 이때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및 성직자 영입 운동을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首席) 역관으로 북경(北京)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고 그 후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상황을 북경교회에 알렸고,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3년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 1836년에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이라는 높은 지위와 대왕대비의 오빠인 황산(黃山)과의 친분으로 인해 체포되지 않았으나 곧 황산이 죽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서양신부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여 신앙을 지켰고, 서양신부들이 체포되자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9월 22일 서고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유중성 [한] 柳重誠

유중성(?∼1802). 순교자. 세례명 마태오. 전라도 전주(全州) 출신. 유항검(柳恒儉)의 조카. 어려서 부친을 잃은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켰다. 1801년 대박해가 일어나 유씨 일가(一家)가 모두 체포되어 두 삼촌 유항검과 유관검(柳觀儉)은 1801년 모두 참수되었고, 그는 사촌 형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숙모 이육희(李六喜), 신희(申喜)와 함께 1802년 12월 28일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15세나 18세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유정률 [한] 劉正律

유정률(1837~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베드로.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로 짚신을 엮어 팔며 어렵게 생활했고, 1864년 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상경하여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성세성사를 받은 후 고향에 돌아와 지난날의 방탕하고 난폭했던 생활을 반성하고 속죄하기 위해 신꼬리를 고편(苦鞭) 삼아 자신의 몸을 심하게 매질하며 극기와 인내의 신앙생활을 했으며 그렇게 변화된 모습에 그의 아내도 큰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다. 그 뒤 1866년 2월 16일(음 1월 2일) 친척들에게 세배를 마치고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듯한 작별 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날 저녁 이웃 마을인 고둔리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낭독하던 중,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禹世英)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이미 체포된 10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함에도 불구하고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이 배교한 교우 100여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하여 결국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대의 매를 맞고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유정률의 성인적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 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유정률은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유월절 [한] 逾越節 [관련] 과월제

⇒ 과월제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유아세례 [한] 幼兒洗禮 [라] baptismus parvulorum [영] baptism of infants [관련] 원죄

유아가 받는 세례. 자신이 범한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세례에 대한 이해와 이를 받겠다는 지향이 없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의 필요성과 타당성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제기되었다. 교회는 시초부터 유아세례를 거행해 왔고 이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인정한다. 그 논거로는 ① 그리스도께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고, ② 이 말씀에 대하여 교회는 혈세와 화세 외에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③ 유아는 자신의 죄는 없으나 원죄가 있고, ④ 성서에 유아세례에 관한 명시적 언급이 없으나 구약의 할례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 ⑤ 유아가 지니지 못한 세례의 신앙과 지향은 교회가 보충한다는 점 등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반대하는 견해가 많았다. 초대 교회 때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지우스는 논리적으로 유아세례의 필요성까지 부인하기에 이르렀는데, 오랜 논쟁 끝에 유아세례만은 인정했으며 이를 계기로 카르타고 공의회(418년)에서 그 필요성을 천명하였다. 중세 루터의 영향 하에 있던 두 지도자 스토르흐(Nicholas Storch)와 스튀브너(Mark Stubner)는 루터의 교리 중 유아세례를 특히 반대하고 유아세례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세례를 거행하여 재(再)세례파라 불린다. 그들은 원죄를 부정하며 유아는 세례받지 않아도 구원된다고 한다. 루터는 교회 전체의 일치된 믿음인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명백히 규정하였다. 오늘날 제7일 안식일교, 침례교, 모르몬교, 퀘이커교 등은 유아세례를 거행하지 않으나 루터교, 감독교(Episcopalian), 감리교(Methodist), 장로교 등은 이를 거행한다. 침례교의 입장은 세례를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자만이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의 운명이 문제된다. 원죄의 결과는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행복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따라서 원죄를 없애지 못한 유아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범죄가 전혀 없으므로 지옥에 가서도 안 된다. 이 두 요건을 구비한 자가 가는 곳을 임보(limbo)라 불러 왔으나 이는 가톨릭의 교의가 아니라 원죄의 새로운 이해와 함께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다. (⇒) 원죄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