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막본당 [한] 龍召幕本堂

소재지는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江原道 原城郡 神林面 龍岩里) 719의 2. 본당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용소막본당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豊水院), 원주에 이어 세번째로 1904년에 설정된 교회이다. 이 교회의 개척자는 제천(堤川) 사람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1848년에 태어나 18세 때 병인(丙寅) 박해를 겪고, 1893년 풍수원본당의 르메르(L. Le Merre, 李類斯)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에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다가 1898년 용소막에 정착, 5∼6명 교우들과 작은 경당을 짓고 원주본당 소속 공소를 개설하였다. 1904년 4월 용소막공소는 원주본당에서 분리, 초대 주임 프와오(Vedastus Poyaud, 表光東) 신부가 부임, 용소막본당으로 발족하였다.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 · 평창 · 영월 · 제천 · 단양 등 5개 군에 공소는 17개로, 본당을 중심으로 사방 300리의 광활한 지역이었으며, 신자수는 864명이었다. 그러나 10여간 초가성당을 짓고 선교를 시작한 프와오 신부가 최도철,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회장 등의 도움에 힘입어 수년 후에는 교세가 1,000명을 넘었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 될 때는 교세 2,000명의 큰 본당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10년 4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기요(J. Guillot, 吉) 신부는 새 양옥성당 건립을 계획, 신축공사를 시작하려던 차에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 반발로 8월에 본국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귀국, 애석하게도 1916년 5월에 전사하고 말았다. 기요 신부의 성당 신축계획을 실천에 옮긴 선교사는 3대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주임신부였다. 그는 1914년 가을에 묘재공소 이사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 1915년 가을에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성당을 준공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1927년 5월 서울의 백동(栢洞, 현 혜화동)본당 창설신부로 전임, 안성(安城)본당에 있던 뤼카(F. Lucas, 陸嘉恩) 신부가 4대 주임으로 있은 뒤, 1928년에는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가 5대 주임으로 사목, 1940년 7월 제천공소를 본당으로 분리 승격시켰다. 같은 해 12월 춘천교구 설정으로 용소막본당은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관, 골롬바노회 선교사들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6.25동란 때는 성당이 공산군의 식량창고가 되어 많은 파손을 보았다. 수복 후에 이종흥(李鍾興, 크리산도) 신부가 11대 주임으로 부임, 성당과 사제관을 원상복구하고 강당을 신축하였다. 1954년 대구(大邱)교구로 이적한 이 신부의 후임으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 증축사업을 계속하면서 성가대를 도시수준으로 육성 발전시켰다. 그 후부터 골룸바노회 신부들이 주임으로 계속 부임했으며, 1965년에 이 본당은 춘천교구와 청주(淸州)교구에서 분할 신설된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다. 그 동안 관할지역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진출 현상으로 교세가 크게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주임은 김태원(요한) 신부이고, 신자수는 744명(1984년 현재), 공소는 3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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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본당 [한] 龍山本堂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1920년경에 약현(藥峴)본당[현 중림동본당]의 공소로 출발, 1941년 용산본당으로 승격, 1942년 초대 본당 사제로 서울 교구 제 9대 교구장을 지낸 프랑스인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부임하였다. 1946년에는 신축된 본당건물로 이전, 1948년에 부임한 2대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는 1952년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1954년에 부임한 5대 조창희(趙昌熙, 베네딕토) 신부는 공사중이던 현 성당을 그 해 12월에 준공시켰고, 1955년 구사제관을 신축, 1960년에는 현 강당을 신축하였다. 1963년 샤르트르 성바오로회 소속의 전교수녀를 상주케 했고, 1965년에는 청파동본당을 분리 독립시켰다. 1969년 공덕동(孔德洞)본당을, 1971년에는 신수동(新水洞)본당을 각각 분리 독립시켰다. 1974년에는 7대 남영희(南永熙, 이시도로) 신부가 구사제관을 헐고 그 자리에 현 사제관을, 1977년에는 주일학교 교리교실을 각각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의 관할구역은 산천동, 도원동, 용문동, 신창동, 원효로 2, 3, 4가, 청암동, 마포동, 도화 1, 2동 등 11개동에 걸친다. 현 본당주임은 김병일(金秉溢, 요셉) 신부, 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신자수는 3,088명(1983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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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본당 [한] 龍門本堂

수원교구 소속 본당. 주보로 ‘매괴의 모후’를 모신 이 본당은 풍수원본당에서 분리되어, 선교사인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가 1908년 퇴촌(退村, 龍門面 德村里)에 부임함으로써 설정되었다. 1909년 조제 신부가 원주로 전임되어 퇴촌은 신부가 공석이 되었는데, 그 대신 능말에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파견되어 전교하였다. 1912년에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자, 퇴촌이 지리적으로 전교상 애로가 많은 위치이기 때문에 19년 마내[龍門面 馬龍里]로 본당을 옮겨, 그 곳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1927년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3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뒤 1937년까지 10년간 전교에 열성을 다한 결과, 200∼300명에 불과했던 교세는 1,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1941년 오연희(吳然喜, 마티아) 신부가 부임하여 전임 신부들의 뜻을 따라, 1943년에 양평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마내본당’은 공소로 격하되었다. 1956년 12월 양평본당의 김정진(金正鎭, 바오로) 신부에 의하여 용문면 다문리(龍門面 多文里)에 성당이 신축되고, 1958년에 김영근 신부의 재부임을 계기로 용문은 양평본당으로부터 독립하여 본당으로 부활하였다. 이해 10월에 양동면 삼산리에 180평의 부지를 사들여 강당도 지었다.

1963년 10월 수원교구 설정과 함께 이 본당은 수원교구로 편입되었다. 김영근 신부가 은퇴한 뒤 1964년 7월 또 양평본당의 공소로 되었다가 1967년 6월에 용문본당으로 부활되었다. 1967년 10월에는 회관을 개수하고 수녀원을 신설하였으며, 성가회에서 2명의 전교수녀가 파견되었다. 1975년 5월 수녀원을 회관으로 개조하여 회의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신자총수는 1,806명이고, 12개의 공소가 관할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초대 조제, 2대 손성제, 3대 김영근, 4대 김경시(金景是, 루도비코), 5대 임종구(林鍾求, 바오로), 6대 이완성(李完成, 요한), 7대 오연희, 8대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9대 이계중(李啓重, 요한), 10대 김정진, 11대 김영근, 12대 이윤성(아우구스티노), 13대 정지웅(鄭址雄, 요셉), 14대 봉준석(奉俊錫, 마우리시오), 15대 김정원(金正原, 프란치스코) 신부 등이고, 현 주임은 배영섭(裵英燮, 베드로) 신부가 16대로 재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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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 [한] 勇德 [라] fortitudo [영] force [관련] 사추덕

사추덕(四樞德)의 하나로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 서라도 선(善)을 행하는 덕의 행위. 그러나 정의에 봉사하지 않는 단순한 용기는 만용이 되기 때문에 항상 정의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용기는 지성에 의해 정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계는 악의 존재로 인해 불의와 부패와 부정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이것들과 싸워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용덕이다. (⇒) 사추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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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한] ~記 [라] Liber Job [영] Book of Job

욥기의 목적은 불의(不義)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악(惡)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곤경 중에 고심하고 있는 인간의 시도인 것이다.

1. 성서 안에서의 위치와 일반적 주제 ① 위치 : 유태인 목록 속에서 항상 히브리 성서의 세 부분(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성문서(聖文書, Ketubim) 안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욥기는 그 안에서 상이한 위치로 배열되어 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를 제외하고 이 책의 정통성이 문제시된 적이 없었다. 성문서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책의 다양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 가장 오래된 전승인 탈무드(Talmud) : 룻기,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니엘, 에스텔, 에즈라. △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anus) : 시편, 욥기, 잠언. △ 예루살렘의 치릴로, 에피파누스, 예로니모, 루피누스, 사도들의 정경, 욥기, 시편, 잠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욥기와 시편이 전승들 속에서 서로 자리바꿈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시리아 번역본 안에서는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 사이에, 그리고 불가타(Vulgata) 속에서는 교훈서 첫 번째에 욥기가 나타나 있음을 숙고할 때, 작품과 영웅의 시대에 영향을 주는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이 같은 상반현상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라틴 교부들은 다른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시서(詩書)의 첫머리에 욥기를 배열한 예로니모의 순서가 불가타의 공식적인 순서로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구서에서는 성서 번역판들이 이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공동 번역도 이 순서를 따른다.

② 일반적 주제 : 이 책의 일반적인 주제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욥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는,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소개된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당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에 처하게 된 욥은 있는 힘을 다해 친구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그가 당하는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겠다고 장담한다. 마침내 야훼가 나타난다. 야훼는 필름의 파노라마와 같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전개하면서 욥이 하고 있는 불평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이 책은 새로운 축복으로, 고통받는 의인이 첫 번째 행복에로 복원되는 것을 내용으로 종결된다,

2. 저작의 일체성 ① 욥기의 외적인 일체성 :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지적해 낼 수 있는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배경, 문체와 단어의 상이함은 이 책이 단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 현재 욥기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성으로부터 교의적인 차원에서의 일련의 동질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즉 불의한 자의 번영에 부딪히고 있는 의인의 고통, 이것이야말로 교의의 중심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질성은 심리적이고 문학적 차원의 숙고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산문으로 된 서론과 결론은 민담(民譚)을 형성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1:1-2:13, 42:7-17). 이 두 곳에서 욥의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라는 곳에, 아마도 사해(死海)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사는 한 사람의 표본적인 인내가 소개되고 있다(1:1).

기원전 587년의 대재앙이 있은 후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의 곤경은 존재에서 모든 가치를 추구하게끔 유도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련한 욥에 대해 잘 알려진 이야기(에제 14:14 · 20)를 사용해서 유배 2세에 속하는 한 시인이 자 기의 선임자(先任者) 에제키엘(기원전 592∼580)의 시와 비슷한 시를 사목적이며 예언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다. 그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영웅과 그의 친구들을 책 속에 등장시켜 존재의 가치를 시적으로 토론하고 인간적 정의(31:35-37)와 신적 정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토론하게 하였다. 주님 자신이 영웅에게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 신적 인도를 벌 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도전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하게 자기의 자만에 대해 뉘우친다(42:1-6). ㉯ 신의 이름이 상이한 형태로 분산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욥이나 그의 친구들 입술 위에 야훼라는 이름 이 올려진 적은 한 번도 없다(예외, 1:21 통상적인 형태). 그러나 시 속에서 다섯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엘로힘, 엘, 엘로아, 샤다이 같은 용어들은 시서 속에 일종의 기교를 가지고 분포되어 있다. ㉰ 끝으로 서언과 결어 부분의 상호 참조(1-2과 42:6-17, 1:5과 42:8, 1:11과 42:7-9을 비교하라), 산문으로 된 이야기와 시의 상호 참조(2:13과 3:1, 42:7과 친구들의 담화), 대화와 신의 현현(顯現)의 상호 참조(13:3-12, 13:25, 16:19-21, 19:25-29, 31:35-3 욥에 의해. 5:8, 8:5, 11:5-6 친구들에 의해. 19:27과 42:5을 비교하라) 엘리후의 담화와 대화와의 참조(32:1-22, 33:9-11), 대화와 지혜적 위의 내용과의 상호 참조는(접근 불가능한 지혜, 이것만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이 책의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하고 이어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의 비판들이 이 책의 일체성을 변호한 것도 결코 놀랍지는 않다.

② 교정의 흔적 : 그렇다고 완전한 일체성에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순서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특별히 지혜를 상기시키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28장). 지혜를 상기시키는 시는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 나타난 주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갈망에 의해 이끌려지지 않고 있으나 신의 현현 부분과 어떤 유사성이 있기에 그곳에 삽입시키는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또한 이 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로서 신적 개입을 취하지 않은 것은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결코 합리적인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야훼의 담화 형태가 첨가나 교정이 그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암시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단 하나의 담화문(38:1-40:2)을 발표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 담화문 속에 삽입되어 있는 타조와 말에 대한 묘사가 원초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39:13-25). 이 담화문에다가 베헤못(40:13-24)과 레비아단(40:25-41:26) 이야기가 삽입되었을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은 초기 도식에 삽입된 것이다. 엘리후는 기다려지던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욥의 대화자들인 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표명하고 합리화한다.

③ 결론 : 결과적으로 일체성의 표지와 이질성의 흔적을 찾아보았는데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이상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주제는 이질성 속에서도 현존하고 있다. 그러기에 문학적 일체성 대신에 유기적 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저자는 아마도 욥의 친구들을 끌어들이고 시적 대화와 야훼의 담화를 지적하고 뒤이어 결말에 필요한 세 대화자를 마지막에 상기시킨 것 같다.

동일한 저자 또는 다른 저자는 이와 같이 구성된 작품 위에다가 야훼의 담화를 첨가해 책 전체를 균형 있게 했을 것이고 토론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33:19-30) 엘리후라는 인물을 끌어들인 것 같다. 이 책의 유기적인 일체성이란 이 와 같이 산문으로 된 내용, 대화, 신의 현현, 즉 근본적인 내용으로부터 출발해서 확대의 양식을 통해 저자가 근본적인 내용에다가 어느 정도 기교적으로 첨부할 새로운 요소들을 풍부하게 하고자 했다는 점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문학유형 : 욥기는 본질적으로 교훈서이다. 욥이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Ayyab이라는 형태로그의 이름이 발견된 것만이 그 점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에제키엘 14:14-20의 암시는 그 자체로서 널리 알려진 현자만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족보의 부재가 욥의 존재에 대해 불리한 증거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욥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외국인으로 소개되어 왔다. 70인역의 부록은 우스라는 땅을 이두메아와 아라비아의 경계 위에 설정해 주고 있다. 이같이 자세한 지형적 정보로부터 욥의 역사성보다도 저자의 조국에 대한 논리를 더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Pfeiffer와 같은 학자는 이 시가 이두메아 땅에서 그 뿌리를 감췄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동양 전승의 기원은 아마도 욥의 역사성과 산문으로 된 내용 안에 나타난 근본적인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게 한다.

지혜문학서에 속한 읍기는 문학형태로 볼 때 상이한 유형에 연결된다, 욥기에 나타나는 대화펀이 철학적 테두리 위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대화편을 플라톤의 대화편과 비교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욥기의 긴 시적인 독백과 플라톤의 짧고 분명하고 분석적인 대화편과는 유사성이 거의 없다. 욥기를 단 하나의 문학양식이나 또는 여러 문학의 혼합양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욥기의 일체성을 고려할 때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니다.

4. 연대 : 이 책은 유배 이후에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배 이후 시대라고 보는 것은 후기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혜문학이 유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기원 전 5세기말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있는 연대이다. 그러나 산문으로 된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에제키엘은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전설적 현자의 유형으로서 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에제 14:14-21). 욥의 역사는 글로써 씌어지기 전에 구전(口傳)의 형태로서 오랜 기간 동안 돌고 돌았을 것이다.

5. 저자 :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최소한 욥기는 그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깊이 있게 종교적, 윤리적인 정신을 가진 자로서 심리적인 예민함에 대해 숙고할 능력이 있고 불행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마도 욥 자신은 고통을 몰랐던 자 같다. 많은 내용들은 그가 매우 박식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욥서에 나타나는 상당수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집트 주위 환경에 대해 종속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28:1-11, 40:15-41, 9:26, 8:11, 40:11-12).

이 책의 영등은 에도미트 족장이며 그래서 에돔에서 사건이 전개되지만 저자가 유다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Kissane은 “시대는 성조시대이며 장소는 에돔땅이다. 그러나 표현된 사상들은 유배 후기의 팔레스틴의 한 유다인의 사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6. 도식(圖式 : 내용분류) : 욥기는 아주 명확한 도식에 따라 인지되어 왔다. 시의 중심부분은 담화의 세 과정으로 되어 있고(3-31장) 폭풍우 속에서 하신 야훼의 응답이 뒤따라 나온다(38-41장). 그런데 담화의 세 번째 과정인 22-27장은 서기(書記)의 잘못으로 인한 사실이거나 오히려 발행자가 욥의 대담한 선언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함으로써 일련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28장의 지혜에 대한 시는 첨가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저자 자신의 저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후의 담화(32-37장)는 더욱 분명하게 원초 도식의 일체성을 흐트러뜨리는 본래 텍스트와는 상이한 형태를 형성한다. 엘리후라는 인물은 욥의 친구들 가운데서, 서언이나 결어 그 어느 곳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는 토론의 세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한 이유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다음의 구절로써 끝맺고 있다. “욥의 말은 끝난다”(31:40). 일반적으로 엘리후의 담화가 욥의 세 친구가 했던 것 보다 더 신중하게 전통적 교의를 방어하기를 원했던 후기 유다인 저자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39:13-18과 40:15-41:26을 후기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① 산문으로 된 서언(1,1a-2,13)

② 담화의 세 단계

㉮ 욥의 통곡(3)

㉯ 첫 번째 단계 엘리바즈(4+5)

욥의 응답(6+7)

빌닷(8)

욥의 응답(9+10)

소바르(11)

욥의 응답(12+14)

㉰ 두 번째 단계

엘리바즈(15)

욥의 응답(16+17)

빌닷(18)

욥의 응답(19)

소바르(20)

욥의 응답(21)

㉱ 세 번째 단계

엘리바즈(22)

욥의 응답(23:1a-24:17, 25)

빌닷(25:1-6, 26:5-14)

욥의 응답(26:1-4, 27:1-12)

소바르(27:13-23, 24:18-24)

지혜에 대한 시(28)

욥의 마지막 변론(29-31)

엘리후의 담화 (32-37)

③ 야훼께서 폭풍우 속에서 응답하시다.

㉮ 첫 번째 담화(38+39)

욥이 자기의 굴복을 표명(40:1-5)

㉯ 두 번째 담화(40:6-41:34)

욥의 참회(42:1-6)

④ 산문으로 된 결어(42:7-17)

7. 욥의 문제 : 대화 속에서 욥은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무죄하다고 느끼고 있다. 선은 보상되고 악은 이 지상 삶에서 처벌받는다는 전통적인 교의(敎義)의 결핍이 확실한 사실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새로운 진리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그 가르침이 욥의 경우와 부합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정통성’의 대표적 인물임을 자처한다. 그들의 태도는 간단하다. 고통은 죄의 처벌이다. 만일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사실들이 순응해야만 한다.

불행한 자인 욥에게 그들이 가져오는 모든 위로란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데 있다.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네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무죄하고 최소한 그 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욥이 전통적인 관점을 받아들이자 온 세계가 자기 앞에 문제시되었다. 모든 것이 문제시된 지금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경우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그의 노력은 별 진전이 없다. 자기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끔 유혹당한다. 욥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길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신앙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욥의 위대함이란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은 그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게 하는 도전에 고통들을 갖다놓을 줄 안다는 것이다.

토론이 절정에 달할 때, 때맞추어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말하기 시작하신다. 세상 묘사하는 것을 듣고 놀란 욥은 신앙고백과 굴종을 언약한다(42:5-6). 하느님을 보았다고 욥은 말한다. 그러나 신비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욥은 죽음 다음에 이어질 보상에 대한 개념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길이란 욥에게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남아 있다면, 욥은 하느님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제부터 하느님 계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점이다.

인내의 인간 욥은 비산(悲酸)하였다. 그의 위치에서 우리는 참된 욥의 모습, 즉 신앙의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을 보았다. 욥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 그 길을 우리가 모르지만 – 인내와 평화에로 이끌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安秉鐵)

[참고문헌] Ancien Testament, TOB, 1977 /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Abiugdon Press / H. Cazelles, Introduction, Chitique a l’Ancien Testament, Desclee et Cie, Pari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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