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본당 [한] 汪淸本堂 [관련] 합마당본당

1924년 만주 간도성 왕청현(間島省 汪淸縣)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준본당. 주보는 성녀 엘리사벳. 합마당(蛤-塘)본당에서 분할, 창설되었다. 준본당으로서 합마당본당에서 관할했는데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합마당본당이 폐쇄될 때 함께 폐쇄되어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1936년의 교우수는 108명이었다. (⇒) 합마당본당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왕림본당 [한] 旺林本堂

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신 이 본당은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華城郡 峰潭面 旺林里)에 있는 유서깊은 성당이다. 속칭 ‘갓등이’로 알려진 이곳은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전후하여 복음이 전해졌으며, ≪치명일기≫에 수록된 최 야고보와 한 안드레아 등 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수원에서 충청도로 가는 좋은 산길에 위치한 왕림리는 박해시대에 전교여행을 다니는 선교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아니라 교우들이 사는 곳이기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공소에 은신하고 있었다.

서울의 주교 · 신부들이 돌보던 이 갓등이공소는 1885년경부터 서울의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혼자 맡아보다가, 1888년 7월 앙드레(J. Andre, 安學古)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한수(漢水)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이듬해에 앙드레 신부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성당을 지었다. 관할지역은 수원군(현 화성군), 용인군, 안성군, 평택군 등 네 군에 공소는 24개, 신자총수 1,790명에 달하였다. 1889년 6월 앙드레 신부는 ‘덕곡(德谷) 김익제(金益濟) 사건’으로 고발당하여 서울 주교관에 소환되었다가 돌아와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대 본당신부로는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부임하였다. 교세의 확장으로 1895년에는 미리내본당을 분할하고, 1901년에는 33간의 웅장한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 뒤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뒷날 광성초등학교(光星初等學校)로 발전하였다. 3대 본당신부인 르 각(C. Le Gac, 郭元良) 신부는 3년간 열심히 전교하다가 1914년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 초대 앙드레 신부와 같이 왕림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행주본당에서 왕림본당까지 겸임하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17년에 주임으로 부임하여 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 69개 공소에 신자는 2,700여명으로 늘었다. 3.1운동 때는 본당관내의 신자인 이순모(李淳模, 가브리엘) 등 6명이 우정면(雨汀面) 여술(현 화수리) 주재소 방화 및 순사(巡使) 타살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0년 봉담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였다가 몇 달만에 6.25로 폐교되고, 1957년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재임시에 발안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1962년 임세빈(林世彬, 요셉) 신부 재임시에는 남양본당을 분할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수원교구로 편입되고, 1971년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재임시에 연와조의 현대식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부임한 본당신부들은 모두 상수도, 전기시설, 양돈, 양계, 약초재배 등 갖가지 사업을 시도하여 지역사회 개발과 본당 및 학교운영의 자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현재 최재필(崔在弼, 안드레아)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는 이 본당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들이 파견되어 있고, 신자총수 1,495명, 공소는 3개소를 관할하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완월동본당 [한] 玩月洞本堂 [관련] 마산본당

경남 마산본당(馬山本堂)의 후신. ⇒ 마산본당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완덕 [한] 完德 [영] spiritual perfection

신자생활에 적용되는 완덕의 개념은 성서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권고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완전’의 용어를 고대에 바바리안들은 용기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은 완전을 인간속에 있는 신성(神性)의 자각으로 보는 신지학(神知學, theosophy)에서도 보여진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완덕을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용기로 보거나, 완덕의 본질이 참회와 고행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완덕에 이르는 인간의 노력을 부인하고 완전한 수동성에 완덕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애덕(愛德)을 완덕의 형식적인 요소로 주장한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안에 계신다”(1요한 4:16)는 성서에 근거한다. 성 바울로도 애덕이 완덕의 끈(골로 3:14)임을 확신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완덕을 두 차원에서 설명함으로써 완덕의 개념을 확실히 하였다. 즉, 첫 번째 완덕은, 전체에서 기인하여 모든 부분들로 완성되는 전체 형식으로서의 완덕이다. 세례를 통하여 회복된 성화은총(聖火恩寵)을 가졌을 때 신자로서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완덕은 작용으로 성취되는 것, 즉 목적으로서의 완덕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덕과 성령의 열매들을 필요로 한다. 애덕은 이 완덕의 근원이 된다. 신자생활의 완덕은 근본적으로 애덕,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인 애덕은 모든 성화수단을 지배하고 목적을 달성케 한다. 애덕은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친교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애덕은 단순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뜻한다. 현세에서 신자는 모든 활동을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행한다.

완덕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노력 정도에 따라 도달하는 단계에 차이가 난다. 즉, 인간이 완덕에 이르는 첫째 단계는 초보자로, 애덕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모든 것 즉, 대죄(大罪)를 피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진보자로, 완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인간애착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완덕자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단계이다. 완덕은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으로 마쳐지지만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완덕은 상대적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한계란 없다.

완덕은 신자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목표로서 명령되어진 것이며, 신자생활을 위한 모든 지침에 기본적으로 존재한다. 즉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 않게 하는 계명의 준수로 가장 낮은 단계의 완덕에 나아간다. 그러나 두 번째는, 사랑의 실제적 실행에 근본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권고를 지킴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그리스도가 완덕의 길을 제시한 복음삼덕(福音三德) 즉 청빈 · 정결 · 순명의 권고이다.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덕의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없지만 권고는 명령과는 달리 자유롭다. 수도자들은 자유롭게 이 권고를 받아들여 이를 다 이루기 위해 서원(誓願)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이 어떤 생활조건이나 신분에 있든지 성부(聖父)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자기 신분에 고유한 완덕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교회헌장 11,4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와이즈먼 [원] Wiseman, Nicholas Patrick Stephen

Wiseman, Nicholas Patrick Stephen(1802∼1965). 영국의 추기경, 웨스트민스터 대주교. 스페인의 세빌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사망 후 일가는 아일랜드로 돌아왔다(1804년). 1818년 로마의 잉글리시 컬리지에 유학, 1824년 박사학위를 취득, 1827년 구약성서의 시리아판(版)을 번역 간행하여 동양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고, 로마대학 동양어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28년 잉글리시 컬리지 학장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영국 가톨릭 부흥운동인 ‘옥스퍼드 운동’의 기수들은 뉴먼(J.H. Newman), 프루드(R.H. Froude)의 방문을 받고 그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1835년 모국을 방문, 로마교회 신앙에 관한 일련의 강의를 함으로써 주목을 끌고, 뉴먼 등과 함께 옥스퍼드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1840년 그는 런던지구의 대목(代牧) 및 버킹검의 오스콧 대학 학장에 임명되어 귀국, 1850년 추기경 및 웨스트민스터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가톨릭적인 종교 향상을 위해 계간(季刊) ≪Dublin Review≫의 창간을 도왔으며(1836년), 그리스도교 박해시대를 소재로 한 소설 ≪Fabiola, or the Church of Catacombs≫(1854년)는 널리 애독되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