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한] ∼書 [라] Prophetia Jeremiae [영] Book of Jeremia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Jeremias, 기원전 650∼588)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傳記]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예레미야서의 다음 장(章)들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예레미야서 19:1∼20:6과 26, 36, 45, 28-29, 51:59-64, 34:8-22, 37-44(이 본문들은 시대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또 다음의 구절들은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를 수 있으니, 예언자가 체험한 내적인 갈등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11:18-12:16, 15:10-21, 17:4-18, 18:18-23, 20:7-18. 이 ‘고백록’은 예언자의 은밀한 체험에서 터져 나온 외침으로서 시편의 탄원시의 문체와도 비슷하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머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 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예레미야의 영향은 막대하였으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며 또 해석하였다. 하여 그의 책, 예레미야서는 단번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는 시문(詩文)으로 쓰여진 신탁(神託)과 전기적 이야기들 뿐 아니라 신명기와도 비슷한 문체로 쓰여진 산문(散文)의 연설들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중의 어떤 본문들은 예레미야의 친저(親著)가 아니라 유배 이후의 신명기적 경향을 띤 편집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이 예레미야의 신학과 설교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니, 신명기를 알고 있던 예레미야의 제자들과 청중들이 수집한 예언자의 전언(傳言)임이 확실하다. 문제는 예레미야적 전승이 하나의 형태로 전수되지 아니 했다는 것이다. 성서의 그리스역본은 마소라 본문보다는 8분의 1가량 짧게 예언자의 말씀을 수록하고 있으니 그 세부묘사도 서로 차이가 있다. 쿰란(Qumran)의 발견은 원래 예레미야서의 두 가지 대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역본은 25:13의 뒤에 수록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을 히브리성서의 순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의 끝부분 곧 46∼51장으로 옮겨 배치시키고 있다. 이 예언들이 처음에 특수한 문집(文集) 안에 수록된 것같다. 어떻든 그 문집의 전체가 예레미야의 전승 안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가령 모압가 에돔에 관한 신탁들은 해석의 흔적이 매우 뚜렷하며, 또 바빌론에 대한 긴 신탁, 50∼51장은 유배시대의 끝에 가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52장은 2 열왕기(列王記) 24:18~25:30에 병행하는 내용으로서 일종의 역사적 부록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작은 문헌들이 예레미야서에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과 새로 탄생한 유다이즘의 공동체들이 얼마나 예레미야를 존중했는가를 입증하고 있다.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예언을 이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시대에 대한 지시사항을 많이 기록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로 연대기의 순서에 따라 그 본문들을 정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책의 무질서한 배치는 오랜 시간 동안의 편집작업이 낳은 결과이다. 또 그 편집과정을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36장은 매우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605년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시켜 자신의 소명 초기부터(626년) 발설한 신탁들을 받아 적게 하였다(36:2). 이 신탁들이 적힌 두루마리를 여호야킴왕이 불태웠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불타버린 신탁들을 다시 보완하여 썼다(36:32). 이 문집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문집은 25:1-12을 서문으로 삼고 1∼18장 안에 들어 있는 605년 이전의 신탁들을 묶었을 것이다. 36:2에 따르면 예의 문집은 25:13-38이 암시하고 있듯이 민족들에 대한 옛 신탁들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 같다. 또 보충문헌들이 문집에 첨가되었으니 그 내용은 605년 이후의 문헌과 민족들에 관한 다른 신탁들이다. 또 거기에 ‘고백론’이 삽입된 것 같다. 그 다음에 따로 수집한 문헌으로서 왕들과(21:11~23:8) 예언자들(23:9-40)에 관한 소책자가 거기에 삽입되었다. 예레미야서는 다음의 장들로 구분시켜 볼 수가 있다.

제1부 : 1∼20장. 제1부는 전반적으로 시대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25:1-13c로 연장된다. 이 연장부분은 1∼20장의 결론이다. 20장과 25장 사이에, 21:1-10과 24장은 왕들과(21:11-23:8) 예언자들에 관한 소책자(23:9-40)들을 끼어들게 하고 있다.

제2부는 25:13a-38에서 시작되는 민족들에 관한 신탁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2부는 46∼49장에 와서 다시 연장되며, 또 여기에 바빌론에 관한 신탁(50-51:58)이 첨가되었고 또다시 전기(傳記)의 소단위(51:59-64)가 부연되었다.

제3부는 편집자가 ‘구원의 약속’으로 간주한 본문들(26-35)을 순서없이 수록한 것이다.

제4부는 전기적(傳記的)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본문은 36∼45장에 이른다. 45장은 전기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서 바룩의 결론이다.

52장은 예레미야서의 부록에 해당하며 기원전 587∼586년의 참변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 여호야킴왕의 출감을 보도하고 있다. (徐仁錫)

[참고문헌] J. Knabenbauer, 1889 / A. Condamin, ed. 2 1936 / G. Ricciotti, 1923 / F. Notscher, 1934 / C.H. Cornill, 1905 / A.S. Peake, 1910-1912 / P. Volz, ed. 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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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규 [한] 禮規 [관련] 예식서 천주성교예규

일반적으로 예규란 가톨릭 교회의 예식들을 지도하는 책을 말한다. 현재는 예식서란 용어로 바뀌었다. 한편 한국 교회 초창기에는 ‘천주 성교 예규’를 줄여서 ‘예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예식서, 천주성교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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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한] 禮

동양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는 것으로서 중국의 고전, 즉 육경(六經)[時, 書, 易, 禮, 樂, 春秋]의 가르침이 비록 다르긴 하나 예를 근본으로 삼았다. 예는 정치, 법률, 종교, 윤리가 미분화된 채 있었던 행위규범(Nomos)이었다. 우선 ‘예’자의 뜻을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해 살펴보면, 밟는다는 ‘이’(履)로 풀이하였는데 그것은 실천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실천함으로써 신(神)을 섬기고 복(福)을 오게 한다는 말이다.

글자의 구성은 ‘示’와 ‘豊’으로 이루어졌다. 이 ‘示’자는 다시 ㅗ과 川으로 되었는데 ㅗ자는 고문(古文)에서 상(上)자와 같으며 하느님, 상제(上帝)를 뜻하고 川은 세 가지를 내려 준다는 뜻으로 해, 달, 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示’자는 하느님이 어떤 꼴(象)을 내려주어 길흉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해, 달, 별은 하늘에 있는 무늬[天文]로서, 인간은 하늘이 보여준 글자[天文]를 깊이 꿰뚫어 봄[觀]으로써 때[時]의 옮아감[變]을 살필 수 있다. 그 다음 ‘豊’자의 뜻을 살펴보면 ‘豊’은 ‘예’를 행하는 그릇으로서 ‘豆’는 그릇 모양을 본뜬 것[象形]이라 하였다. ‘豆’는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이요, ‘豆’위의 曲자는 조개[蛤리]로 만든 술잔, 또는 옥(玉)을 담는 것이다. 그러니까 ‘豊’자는 제기[豆]뒤에 담아 바치는 물건[祭物]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示’자와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禮’자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示] 은혜(해, 달, 별)에 보답하기 위하여 인간이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어 복을 비는 종교적 의식을 상징한 것이다. ‘예’에 따라 거행되는 종교의 예는 원래 신성한 것이었으므로 일정한 절차를 요하는 것이었고 함부로 접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자(漢字)의 離(li)(떨어지다, 간격을 두다)는 원래 豊(li)자와 통용되는 음이었고 그것은 금기(taboo), 격리된 것을 뜻하였다. 즉 어떤 신비한 힘(mana)을 가진 것에 대한 금기라는 뜻이다. 어떤 신비한 힘을 가진 것에 대하여는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범하면 화(禍)를 입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목숨까지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제정(祭政)일치 시대의 종교적 의례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숭배의 대상은 주로 자연(自然)과 조상(祖上)이었으며, 거기에 신비한 힘이 깃들이게 되면, 자연은 천신(天神)이 되고 조상은 인귀(人鬼)가 된다.

중국 고대인들은 처음엔 다신론적 정령(精靈) 사상을 믿었으나, 차츰 천신, 지지(地祗), 인귀로 정리되었다. 제정시대의 예는 크게 하느님에게 제사[祭天] 지내는 교사(郊社)의 예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祀告] 종묘(宗廟)의 예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의 원초적 의미는 바로 ‘천’(天)에 대한 공경과 신앙의 정감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제례(祭禮)가 제정의 구실을 겸했기 때문에 통치자인 천자(天子)가 행하는 ‘예’였다. 천자는 천의 명을 받은 그 대행자로서 천과 백성들간의 매개자였다고 할 수 있다. 천자를 중심으로 한 집례자(執禮者)들이 바로 유자(儒者)의 선구자였다. 천자가 거행하는 종교적 의례는 단순히 천에 대한 제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천의 권위로써 일반 백성들의 정치적 윤리적 생활을 지도하고 규제하는 데 기여하였다. 천자의 예는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국가의 전례(典禮)로 발전했고, 이것이 정치의 근본[政之本]으로서의 예가 된 것이다.

이 예는 바로 주대(周代) 봉건제도에서 볼 수 있는 신분(身分)의 상하, 반작(班爵)의 반별, 장유(長幼)의 차등인데 이것은 조근(朝覲)의 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 질서의 뒷받침이 되었던 ‘예’는 형식만 남게 되었다. 공자는 형식만 남아 있는 ‘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인(仁)과 의(義)였다. 또 과거의 예는 치자(治者) 중심으로 행하여져서 서민에게까지는 내려가지 않았으며[禮不下庶人], 형벌은 귀족들에게 까지 올라가지 않았다[刑不上大夫]. 그런데 공자는 서민도 ‘예’로써 인도하고 다스리면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또 바로잡는다[齊主以禮, 有恥且格]고 하여 예교(禮敎)를 주장하였고, ‘인’을 실천하는 것이란 자기 욕심을 누르고 ‘예’에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 생각하였다. 여기서 ‘예’는 정치의 근본으로서가 아니라, 윤리도덕의 근본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공자 이후 복례(復禮)의 측면을 발전시킨 인물이 순자(荀子, 기원전 298∼235)있으며, 그의 예론(禮論)은 뒷날 거의 모든 예학(禮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예에 관한 문헌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서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가 있다. 그 뒤 각 왕조에서 각기 특별한 의례가 제정되었는가 하면, 또한 종법제도를 합리화한 가례(家禮) 등도 편찬되었다.

예의 내용은 보통 길(吉), 흉(凶), 군(軍), 빈(賓), 가(嘉)의 오례(五禮)로 나누어지며, ① 길례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나라 제사의 모든 예절을 지칭하며, ② 흉례는 죽은 사람의 장송(葬送) 등의 예식을, ③ 군례는 군대에 관련한 예절을, ④ 빈례는 빈객(賓客)에 관한 예절, ⑤ 가례는 관례(冠禮)나 혼례 따위의 경사스러운 예식을 가리켰다. ≪주례≫의 내용에서처럼, 국가의 관제(官制) · 법제(法制)를 적은 경우도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사회의 기능분화에 따라서 법이나 율령(律令), 직관(職官)으로서 분립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예’는 한국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475)는 우리나라에서 오례 중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으로 편찬, 완성한 것이며, 고려말에 한국에 수입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인데,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됨에 따라, 위에 말한 예제의 준행이 권장되고 차차 보편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예학파(禮學派)의 대두, 가족제도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경직화된 ‘예’의 준행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새로운 문화의 도입에 역기능을 한 면도 있었다. (鄭仁在)

[참고문헌] 說文解字 / 加藤長留, 中國思想史 / 李乙浩, 禮槪念, 茶山學의 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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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본당 [한] 永興本堂

1931년 함경남도 영흥군 영흥읍(咸鏡南道 永興郡 永興邑)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함흥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셉. 히머(C. Hiemer, 林) 신부가 창설 신부로, 스테거(G. Steger, 全) 신부가 보좌로 부임, 1934년 성당을 건축하고 전교에 힘써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1936년 흥남(興南)본당을 분할, 창설시킴과 동시에 히머 신부가 흥남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자 보좌이던 스테거 신부가 2대 주임이 되었다. 스테거 신부는 13년간 주임으로 재직하면서 열심히 사목하는 한편 교세신장에 주력하여 인근 지역에 23개에 달하는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8.15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 주교, 덕원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 로트(L. Roth, 洪) 신부, 부원장 실라이허(A. Schleiher, 安) 신부, 덕원 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R. Klingseiz, 吉) 신부 등이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5월 11일 본당 주임 스테거 신부가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스테거 신부는 체포된 이듬해인 1950년 10월 3일 평양감옥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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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한] 靈魂 [라] anima [영] soul

현행 가톨릭 교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로마 가톨릭 교리서≫(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 요리문담≫)에 따르며,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한 자니라”라고 되어 있고, 현행 ≪가톨릭 교리서≫에도 “하느님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이부(二部)구조적인 인간관은 창세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론에 근거를 두는 것이지만 이 교리가 형성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우선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을 인간생활의 원칙으로 보았는데 플라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자체가 삼부(三部)구조로 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욕정의 원리인 탐욕혼이 복부에 자리 잡고 있고, 용기와 정기의 원리인 기혼(氣魂)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각의 원리인 지혼(知魂)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지혼은 불멸의 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자연철학적인 원리인 질료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구조원리가 그렇듯이 모든 생물의 구성원리는 원질(原質) 혹은 질료와 체형(體形) 혹은 형상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의 체형 또는 형상이 혼이다. 따라서 식물에게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게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이 각혼은 생혼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혼(知魂)이 있는데, 지혼은 생혼, 각혼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사도 바울로도 심령과 영혼과 육신의 삼부구조적인 인간관을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가르쳤다(1데살 5:23). 그러나 그의 용어에서 심령(spiritus)은 영혼의 자연적인 생활과 대조적으로 초자연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혼과 육신의 자연적인 생명에 성령의 영을 받은 심령을 역설하는 종교적인 인간관을 설파한 것으로 보인다. 성서적인 인간관을 학문화하는 과정에서 초대 교부(敎父)들은 이교도들의 유물론적 범신론적 또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미하여 구구한 학설이 나왔다.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어 영혼의 육체성을 주장하였고, 성 이레네오(St. Irenaeus)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리제네스(Origenes)는 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전생설을 지지하고 전생의 죄 때문에 영혼이 육체 속에 갇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잡다한 교부들의 설은 니체아 공의회 뒤 거의 없어지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성 아우고, 네메시우스(Nemesius, 4세기)와 증거자 성 막시모(St. Maximus Confessor, 6세기)에 이르러 이미 중세 스콜라 철학적인 영육의 이부구조적인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의 자연철학을 따르면서 인간혼은 개성을 가진 영체로서 육신의 체형 또는 형상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영혼은 죽은 뒤에라도 육신과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과 합하여 완전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영혼 자체는 순수 영체로서 불사불멸하지만 천사와는 다르다. 영혼이 어떻게 생겨서 육체와 결합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설로 낙착되었다.

① 전승설(傳承說, traducianism) : 니사의 그레고리오(4세기), 테르툴리아노(2∼3세기) 등 초대 교부들이 주장했던 설로서 부모의 생식행위 때 부모의 영혼이 유전적으로 전승된다는 주장이다. 이 설은 원죄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장한 것으로 아우구스티노는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재위 : 496∼498)는 이 설을 오류로 단정하였다. 이 설은 19세기에 로즈미니(Rosmini-Serbati)를 위주로 하는 몇몇 신학자들이 다시 주장하면서 인간혼은 부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감각적 영혼으로 만들어졌다가 하느님의 빛을 받아 영적인 영혼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생식설(generatianism) : 이 설은 전승설의 완화된 주장으로 “육신이 육신을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영혼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마카리우스(Macarius, 4세기), 루피누스(T. Rufinus, 345?∼410), 네메시우스 등이 이 설을 주장하였고, 19세기 로즈미니의 전승설과 함께 또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부분이 아니고 무에서 부터의 창조물이다”라고 선언한 성 레오 9세 교황(재위 : 1049∼1054)의 선언(Denzi. 348)을 지지하는 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③ 유출설(emanatism) : 신플라톤 학파 특히 알렉산드라아 학파에서 부르짖은 학설로서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가 주창자이다. 이 설에 따르면, 만물은 절대자인 일자(一者, One)에서 나왔는데 첫 유출물은 정신(Nous)이며 정신에서 세계혼이 유출되며 세계혼은 물질화하려는 경향에 따라 각개의 영혼을 유출시켜 모든 사물의 형상을 이룬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이 설은 뒤에 프로클루스(Proclus, 410?∼485), 가(假) 디오니시오 등 신플라톤 학파의 교부들이 그리스도교화 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에서 오류로 판정되었다(I. De Deo rerum omnium creatore, can. iv).

④ 진화론 : 진화론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모든 것은 하등동물에서의 진하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설은 가설로서 교회는 단지 인간혼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는 것과 영혼이 물질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과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이다(비오 12세 교황의 Humani generis 1950). 그러므로 하느님이 원초적인 생물체에서 인간생물체로 진하 발달하도록 안배하여 창조했을지 모른다는 종교적인 진화론은 가톨릭 신앙과 위배되지는 않는다.

⑤ 창조설(creationism) : 교회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로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창세기를 기반으로 한 교리이지만 각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영혼이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락탄시오(Lactantius), 암브로시오(Ambrosius), 예로니모(Hieronymus) 등 교부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1100?∼1160)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각 사람의 영혼은 육체에 부여되어 창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설을 지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으로 철학적인 설명을 하였다. 즉 영혼은 육체의 체형이며 육체와 함께 인간개성의 실체를 이룬다. 육신과 영혼은 일체를 이루는 공동구성 원리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영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떠나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다[죽음]. 그러나 영혼은 어디까지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이 천사와 다르다. 아퀴나스의 인간관은 스콜라 학파의 일관된 주장이며 교회는 이 설을 정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白敏寬)

[참고문헌] A. Pegis, St. Thomas and the Unity of Man, in J. McWilliams, ed., Progress in Philosophy, pp.153-173, 1955 / Centre Catholique des intellectuels francais, L’ame et le corps, 1961 / C. Tresmontant, La Metaphysique du Christianisme, 1961 / R.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IV,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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