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미사 [한] 永定∼

신자가 토지나 전답을 교회에 기증,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미사예물로 하여 봉헌되는 미사를 말한다. 토지나 전답은 매년 고정적으로 수익이 생기기 때문에 토지나 전답을 기증한 신자는 따로 미사예물을 준비할 필요없이 자신을 위한 생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또 사후에도 계속 자신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생전에 토지나 전답을 교회에 기증, 사후에 그 수익금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위령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8.15광복 후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이러한 영정미사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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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한] 靈的讀書 [영] Spiritual reading

보다 밀접하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읽는 독서를 말하며 그 기원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생활에 있다. 성서, 교부들의 저작, 교황이나 주교의 저작, 성인들의 저작, 성인전, 그외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에게 봉사하기 위해 씌어진 책 등이 영적 독서로 많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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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한] 靈跡 [관련] 기적

기적의 옛말. ⇒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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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여자기예학원 [한] 永柔女子技藝學院

1927년부터 평양교구 영유본당에서 운영하던 여자기술학원. 12세부터 19세까지의 여학생 50명을 모집하여 3학급으로 나누어 자수(刺繡) 및 교리 · 조선어 · 일어 · 산술 등을 메리놀수녀회 수녀들이 가르쳤고,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본에 의한 메리놀회 선교들의 감금으로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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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본당 [한] 永柔本堂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平南 平原郡 永柔邑 梨花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파트리시오. 영유지역은 1895년 영세 입교한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漢學者) 조상순(趙象淳, 노르베르토)에 의해 전교된 후, 1897년 섶가지[薪枝里]본당 관할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02년 군청소재지인 영유가 전교요충지로 선정되어 섶가지본당이 폐쇄되고 그 후신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섶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明) 신부가 부임,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학교를 개설했고 1911년 보댕(Bodin, 邊)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그 후 1919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각종 신심단체를 조직했고 1923년 메리놀회가 진출하여 1924년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기 시작하면서 교세가 급격히 신장, 본당 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하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이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와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 내에 설치되어 동(同)회의 수녀들이 본당사무 일부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고, 1926년 순천 · 마산본당, 1930년 안주본당, 1931년 숙천본당 등을 분할 독립시켰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경(日警)에게 체포 구금되자 영유본당은 한 때 마산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으나 평양교구가 방인교구로 재정비되어 1942년 10월부터 신부들이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메리놀수녀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유분원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洪道根, 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 양로원 ·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는 가톨릭청년회, 명도회, 안나회, 가톨릭소년단, 예수성심연맹, 가톨릭운동연맹지회 및 분회, 소화데레사회, 성모회 등이 있었고, 부속사업체로는 영청학교, 1927년 개설된 여자기예학교(女子技藝學校), 1926년 개설된 시약소와 고아원, 1931년 개설된 양로원 등이 있었으며, 관할공소로는 평남 평원군과 대동군(大同郡) 일대의 송림(松林), 추흥(楸興), 금학(金鶴), 남양(南陽)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의 교세는 신부 2명, 수녀 4명, 총교우수 1,500명, 공소수 12개소, 주일학교 10개소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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