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본당 [한] 釜山鎭本堂

주보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모시는 이 본당의 설정은 188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교구로부터 영도에 있는 김보윤(金甫允, 로무알도)에게, 부산지방에 본당을 설정하니 신부를 영접해 가라는 통보가 왔다. 당시 경상도에는 로베르 (Rovert, 金) 신부가 대구에서 약 30km 떨어진 ‘신나무골’에 은거하면서 대구는 물론, 경상도 북부와 남부지방을 두루 사목하였는데, 경상도지방을 신부 혼자서 전교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교구에서는 경남일대를 관할하는 부산본당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 때 경주에서 피난와 영도에 은거하고 있던 김보윤은 그 해에는 신부를 맞으러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대구 새방골 이장언(李章彦, 프란치스코)과 함께 김보윤은 조조(Mouse Jozeau, 趙得夏) 신부를 안내하여 부산에 부임케 하였다.

조조 신부는 현 청학동성당 수녀원 자리를 임시 본당으로 정하고, 여기에서 2년 가까이 부산지방과 경남일대를 전교한 뒤, 1891년 7월경 영도를 떠나 지금의 부산시 대청동(大廳洞) 2가 15번지에 임시 성당을 지어 옮겼다. 1900년 7월에는 초량(草梁) 3동 47번지(현 초량입구 정발장군 동상 근처)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여 10여년을 지낸 다음, 또 본당의 위치를 부산의 중심지인 범일동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교구장으로부터 허락받아, 대지(현 데레사 여자 중고등학교 자리)를 마련하여 목조건물의 성당을 짓고, 본당을 초량으로부터 이전함과 동시에 교회 이름도 ‘부산진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부산본당을 동래 지역에 정하여 활발한 전교를 하려던 창설당시의 꿈이 실현된 셈이었다.

당시 본당의 관할구역은 낙동강 동쪽지역인 양산 · 동래 · 김해를 비롯하여, 영도 · 경주 등 32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32년 청학본당 등을 분할하였으나, 일제 말기의 종교탄압으로 신부는 감금당하고 본당은 징발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세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1948년 중앙본당의 분할을 시작으로, 1951년 초량본당과 동래본당을, 1952년에 동항본당을, 1956년에는 광안본당 등 많은 본당을 분가하였다. 1964년 10월 현 성당의 소재지인 범일동 1375번지에 새 본당 건축을 기공, 1965년 12월말 연건평 7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당을 완공, 1966년 9월 18일 ‘부산진본당’을 ‘범일본당’으로 개칭하고, 그 해 12월 8일 최재선(요한) 주교의 집전으로 범일본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975년 1월 문현본당을 분할하고, 1978년 11월에는 본당설정 90주년 기념 성서의 밤을 성대히 올렸다. 현 본당 주임은 제 30대 장병룡(張丙龍, 요한)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수는 5,803명(1983년말 현재)에 달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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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앙본당 [한] 釜山中央本堂 [관련] 중앙본당

부산교구 주교좌본당. ⇒ 중앙본당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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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 釜山敎區

부산직할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교구. 부산지방의 포교를 제일 먼저 담당한 선교사는 1889년에 입국하여 그 이듬해에 부산에 내려온 조조(Joseau, 趙得夏) 신부였다. 1911년 초대 대교구장으로 취임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1898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그 이듬해에 첫 포교지로 부임한 곳도 부산이었다. 이렇듯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방은, 대교구에 속하게 되면서부터 급속히 교세가 신장되어, 1954년 6월 18일에는, 이 지방을 교구로 발족시킬 준비로 경상남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감목대리에 서정길(徐正吉)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 해 12월 14일에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가 별세하였으므로, 그 후임으로 서정길 감목대리가 임명되니, 경남 감목대리에는 정재석(鄭在石)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 뒤 교세가 계속 늘어나므로, 1957년 1월 21일에, 마침내 부산교구(대목구)가 설정되어, 초대 감목에 최재선(崔再善) 신부가 임명되었다. 최 교구장은 그 해 5월 30일에 주교로 성성(成聖)되었고, 대교구의 경남 일원을 완전히 이양받았다. 이어 1962년 한국 가톨릭 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정식교구로 승격되어, 최재선 주교의 착좌식에 그 해 7월 17일에 거행되었고, 1966년 2월 15일에는 마산교구(馬山敎區)가 독립되어 부산교구에서 분리 독립되었으며, 1971년에는 이갑수(李甲秀)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교구의 관할지역은 부산직할시, 울산시(蔚山市), 김해시(金海市), 울주군(蔚州郡), 밀양군(密陽郡), 양산군(梁山郡), 김해군(金海郡)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1982년 말 현재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수 16만 6,066명, 본당 57개소, 공소 39개소, 한국인 주교 2명, 한국인 신부 88명, 외국인 신부 16명, 한국인 수사 19명, 한국인 수녀 551명, 외국인 수녀 16명, 남자수도단체 7개, 여자수도단체 18개, 병원 3개소, 보육원 4개소, 양로원 1개소, 나병수용소 3개소, 유치원 27개소,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3개교, 대학교 1개교, 주일학교 57개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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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제 [원] Bourget, Charles Joseph Paul

Bourget, Charles Joseph Paul(1852∼1935).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 평론가. 시인. 아미앙(Amiens) 태생. 처음에 시를 쓰다가 후에 소설로 전환하였다. 처녀장편 ≪L’Irreparable≫(1884)에서부터 상류사회의 내면을 폭로하는 ‘거짓’에까지 심리를 세밀히 분석한 소설을 썼다. 또한 당시 프랑스 사상계의 거물 텐(Hippolyte Taine)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 문제소설 ≪제자≫를 발표하였다. 그 밖에 ≪죽음의 의미≫(Le Sens de la Mort, 1915) 등이 있으며, 근대 심리소설의 개척자라 일컬어진다. 비평적 저술로는 ≪현대 심리론집≫이 있다. 작가활동 외에 정치 · 사회 · 종교 등의 문제에도 예리한 발언을 했지만, 보수적인 계급옹호의 입장을 취했으며,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반(反)드레퓌스파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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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라] vocatio [영] calling, vocation [그] Klesis [독] Beruf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을 불러 특별한 목적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 자신이 베푸는 은혜와 구원을 풍성히 받게 한다는 성서상의 가르침이다. 소명(召命)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구약의 카라(qara)는 ‘부르다’의 의미를 가지며 ‘초대하다'(1사무 16:3), ‘소환하다'(2사무 1:15), ‘이름을 부르다'(창세 11:9)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즉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여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세(출애 3)와 예언자들(사도 6, 예레 1:4-10, 아모 7:14-15)을 불렀던 사실에서 부르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신약에서는 Klesis로 카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이나 그리스도 성령이 사람을 부르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르심에 대한 교리는 바울로의 신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바울로의 문헌에서 부르심은 그리스도교 안으로의 초대가 일차적이고, 이를 통한 하느님의 목적과 행동의 전개는 부르심의 예정, 부르심, 영광으로 이어진다. 즉 하느님은 인간구원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유태인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인들도 부르셨다(로마 9:24). 바울로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현세적 생활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켜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 부르심이 머무르는 곳은 교회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교회의 공동체적 생활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생활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깨닫고, 자기가 해야 할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넷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합심,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중세시대에는 성직제도, 수도원제도의 발달에 따라 성속(聖俗)의 구별이 생겨나고, 교회에서는 성직만을 부르심(vocatio)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체로 스콜라신학에서는 성직자 우위와 일반직에 종사하는 자의 하위적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모두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공동선을 이뤄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웃에 봉사하며 노동하는 직업은 모두 상하의 구별 없이 부르심에 속할 수 있겠다. 즉 성서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부르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일이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하느님에 대해 복종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자신은 왜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부르고 계시는가, 그러한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가 곧 신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은 인간이 이룩한 성과나 업적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써 주어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L. Brancherau, De la Vocation sacerdotale, Paris 1896 / J. Lahitton, La Vocation sacerdotale, ed. 2, Paris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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