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스정교조약 [한] ∼政敎條約 [라] concordatum Wormatiense [독] Wormser Konkordat

교황 갈리스도 2세와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가 그간의 서임권투쟁(敍任權鬪爭, Investiturstreit)을 종식시키기 위해 1122년 보름스에서 맺은 조약. 이제까지 황제와 교황은 서로 배타적인 임직권을 갖기 위해 서로 싸웠는데, 이 조약을 통해 양측은 이중임직(二重任職)에 합의함으로써 주교의 선출권이 주교좌 성당의 성직자(13세기의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에게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주교 선출의 자유와 교회의 임직을 보장되는 대신 황제는 주교에게 세속적인 임직을 수여하였다. 즉 봉토(封土)를 수여함으로써 그를 세속적인 영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보름스 조약은 주교에게 2개의 지위, 즉 주교로서의 영적인 지위와 영주로서의 세속적인 지위를 동시에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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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메오 [라] Borromaeus, Carolus

Borromaeus, Carolus(1538-1584). 성인. 주교. 축일은 11월 4일. 전형적인 트리엔트적 사목(司牧) 주교. 밀라노의 대주교. 추기경. 주교직의 쇄신에 앞장선 가톨릭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다. 마조레(Maggiore) 호수 가까이에 있는 아로나(Arona)의 귀족가문출신으로 일찍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었다.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 1559년 외삼촌인 새 교황 비오(Pius) 4세에 의해 발탁되어 1560년 추기경 및 밀라노의 대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62-1563년)의 제3회기 및 마지막 회기에서 교황을 보좌, 공의회 정신을 반영하여 본당신부를 위한 로마 교리문답서 ≪로마 공교요리(∼公敎要理)≫(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를 초안, 감수하였다. 밀라노로 돌아오자 스스로 가톨릭 개혁의 기수로서 교구에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 성직자와 평신도의 도덕 및 예절을 강화시키고 교구 업무의 원활을 기하였다. 또한 예수회(Societas Jesu)를 지원하여 예수회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개혁은 교구 내에서 커다란 반감을 일으켰으나 ≪밀라노 교회문서≫(Acta ecclesiae Mediolanensis, 1582)에 수록되고 그 후 자주 인쇄된 그의 개혁주장은 이탈리아, 독일, 특히 스위스의 주교들이 개혁활동을 추진하는데 있어 표준이 되었다. 1610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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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례 [한] 補禮 [라] caeremonia supplementi

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그 한 예를 든다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죽음이 임박했을 경우나 사제(司祭)가 없을 때 일반 사람들도 성세성사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물로써 이마를 씻으며 기도문을 욈으로써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을 대세 또는 ‘비상세례’(非常洗禮)라고 하여 정식 세례와 똑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에서 비상세례를 받은 자가 죽지 않고 살아났을 경우, 또 사제가 없어서 비상세례를 받았을 경우 신자 생활을 하려면 그 때 갖추지 못한 예식들을 보충하는 ‘보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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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네 [원] Baudounet, Francois Xavier

Baudounet, Francois Xavier(1859-1915).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대구교구 선교사.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고 동료신부 두 사람과 함께 그해 11월 19일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도중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한 세 사람은 블랑(Blanc) 주교로부터 두 사람만 들어오고 한 사람은 남아서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고, 제비를 뽑은 결과 보두네 신부가 남게 되었다. 그 동안 인쇄일로 나가사끼에 건너온 코스트(Coste) 부주교를 만났고, 1885년 8월에야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다음 6개월 뒤에는 경상도 신나무골로 갔고 거기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여, 이듬해에 전라도 지방을 맡게 되었을 때에는 이젠 모국어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박해가 사라져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全州) 시내에 정착하였는데, 그 때가 1891년이었다. 당시 전주에는 신자집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을 때에는 몇 사람의 신부가 나누어 맡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신자수가 급격히 불어났었다.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신부는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임지로 내려가 폐허가 된 교회 재건에 전심하였다. 동학란으로 교세는 오히려 늘어나 이젠 더 큰 성당을 지어야만 했으므로 그는 모든 경비를 절약했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도 팔아 성당 건립을 위해 충당하였다. 이 때 건립한 전동(殿洞) 성당은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리하여 헌신적으로 한국인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1915년 5월 27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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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학교 [한] 普德學校

평양교구 순천본당의 낙민면(樂民面) 교우들이 1909년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1911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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