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대성전 [한] ∼大聖殿 [영] St. Peter’s Basilica

로마의 5대 바실리카의 하나로 교황청에 인접해 있는 총대주교좌 성당이다. 최초의 베드로 성당은 90년경 교황 아나클레토(St. Anacletus)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운 작은 기념당이었다. 그 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베드로가 처형된 원형 경기장을 헐고 기념당과 무덤을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 성전은 1100년경까지 존속하였고, 몇 번의 개보수(改補修)를 거쳐 낡아진 대성전을 헐고 더욱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립하려 한 사람은 교황 니콜라오(Nicolaus) 5세였다. 교황의 명을 받은 르네상스기의 대미술가 브라만테(D. Bramante),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등이 설계하여 176년간에 걸친 대역사를 통해 완공되었고, 1626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노(Urbanus) 8세에 의해 성대한 헌당식이 거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대성전은 최대길이 221m, 최대높이 141m로 세계 최대의 성당일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그 독창적인 구상과 중앙의 거대한 돔(dome) 양식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성전 앞 대광장(plazza)의 중앙에는 베드로의 처형대로 사용되었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세워져 있고, 대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주랑(柱廊)에는 높이 약 3.6m에 이르는 126성인의 입상이 늘어서 있다. 성전의 정면에는 입구 위로 길게 내뻗은 난간(Loggia della Benedizione)이 있어 교황이 이곳에서 축복을 내린다. 이곳을 지나면 5개의 입구를 거쳐 성당 내부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년에만 열리는 성년(聖年)의 문(porta santa)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수도회 창립자들의 거대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 중앙 통로를 지나 중앙의 대제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대제단은 1633년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으로 여기에는 95개의 등불이 밤낮 없이 계속 타올라 아래층의 청동관을 비추고 있다. 대제단에서 조금 들어가면 바로크 양식으로 된 베드로의 교좌(敎座)가 놓여 있다. 한편 지하성당에는 베드로의 무덤과 수많은 교황들의 무덤이 있고, 지하성당에서 올라오는 계단 위에는 베드로의 청동상이 놓여 있는데 수많은 순례자들이 청동상 오른쪽 발끝을 어루만지고 입맞추었기 때문에 닳아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밖에 성당 안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pieta)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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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클라베르 [라] Petrus Claverius [스] Pedro Claver

베드로 클라베르(1581-1654). 성인. 증거자. 스페인의 베르두(Verdu)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나 1602년 다라고나에서 예수회에 입회, 남미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에서 사제로 서품(1616년), 노예매매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약 40년간 흑인노예들의 정신적, 물질적 소망을 이루어 주기 위해 ‘노예의 노예’로서 봉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약 40만명 이상을 개종케 하고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흑인들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1888년 시성(諡聖), l89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흑인포교의 수호성인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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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크리솔로고 [라] Petrus Chrysologus

Petrus Chrysologus(406-450). 성인. 축일 7월 3일. 주교. 교회학자. 이탈리아의 이몰라 태생. 명설교가로 알려져 있다. ‘chrysologus’는 ‘금언’(金言)이란 뜻의 그리스어인데, 이것은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ysostomus, 347?-407)의 ‘chrysostomos’ 즉 ‘황금의 입’이란 뜻에 견주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벤나의 주교가 된 후 최초의 설교를 서로마 여황제 갈라 플라키디아(GaIla Placidia) 앞에서 했는데, 그때부터 여황제의 끊임없는 지지를 얻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와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어서 아리우스주의, 펠라지우스주의, 마니교(敎)등을 논박하였다. 또한 로마 주교좌에 대한 신앙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에우티케스(Eutyches)에게 보낸 편지(449년)에 의하면, 에우튀케스 논쟁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는 로마 주교측보다 오히려 에우튀케스에게 더 호의를 표시하였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오늘날 잔존하고 있지만 그밖의 문서는 거의 모두가 남아 있지 않다. 설교의 주요한 것은 빈첸티노(Agapitus Vincentinus)에 의해 볼로냐에서 출판되었다(1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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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후서 [한] ∼前後書 [관련] 베드로의 편지

⇒ 베드로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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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다미아노 [라] Petrus Damianus

Petrus Damianus(1007-1072). 성인. 축일은 2월 21일. 주교. 교회개혁자. 이탈리아의 베네딕토회 신학자. 라벤나(Ravenna)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파엔자(Faenza)에서 사망하였다. 파르마, 모덴자, 파엔자에서 교육을 받고 1035년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몇 개 수도원을 창설하고, 낡은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1057년 교황 스테파노 9세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이 무렵부터 교회개혁에 중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세속화와 성직매매를 하는 자에 대해서는 타협을 배제한 설교자로서 유명해 졌다. 특히 호노리오 2세와 같은 대립교황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1059년 밀라노 교회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몇 차례나 교황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프랑스 및 독일에 파견되었다. 1069년에도 교황사절로 독일에 가서,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황후 베르타에 대한 이혼문제에서 황제를 설득하여 무마시켰다. 1072년 고향 라벤나를 마지막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파엔자의 산 마리아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유해는 현재도 산 마리아 대성당에 묻혀 있다. 1828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추서되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저서를 간행하여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명령하였다. 교리적으로는 ‘정죄’(淨罪), ‘성찬’ 및 성직매매자에 의해 관리되는 ‘성전례’가 정당치 않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11세기 스콜라철학 부흥기에 있어서 스콜라에서의 인문학과 중에서 논리학이 최상위에 놓여야 한다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신학자 입장에서 이에 반대하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요저서로 성직자의 결혼을 반대한 ≪Liber Gomorshianus≫와 성직매매를 반대한 ≪Liber Gratissimu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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